<가짜 노동>을 보고.
영상보다는 글을 좋아한다. 정보를 찾을 때도 유튜브보단 책을 먼저 읽는 편이다. 있어 보이려는 건 아니고 단지 성격이 급해서 그렇다. "아니 성격이 급한데 어떻게 책을 봐요!"라는 분들께는 글은 생각보다 빠른 매체임을 말해드리고 싶다. 300페이지 분량 책을 읽는데 서너 시간이 걸리는데 그걸 유튜브로 만든다면 족히 열 시간은 넘을 거다.
하지만 이런 나도 즐겨보는 프로가 있다. 바로 알쓸신잡 시리즈다. 알쓸신잡이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의 줄임말이다. 알아둬도 쓸데가 없다는 말이 매력적이다. 허영 가득한 나는 <알쓸신잡 1>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프로 출연진들도 매력적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박학다식하면서 쉽게 설명하지란 의문을 품게 하는 김영하 작가님부터 아는 게 참 많은 유시민 작가님, 곰돌이 푸를 닮았지만 냉철한 질문을 던지는 과학자 정재승 박사님 그 밖에도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지식인 게스트들을 보는 경험은 짜릿한 일이었다.
그들이 정해진 지역을 각자 여행을 하고 와 저녁에 풀어놓는 썰 들은 옛날 중동으로 파견 나간 삼촌이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와 세상 진기한 물건과 이야기를 풀어놓는 느낌이었다.
2017년에 시작한 이 시리즈가 연도를 거듭해 벌써 2023년 <알쓸인잡>까지 왔다. 조용하게 시작했던 방탄소년단 RM이 사회자로 참여해서 화제가 됐던 이 프로에서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님이 <가짜 노동>을 언급했다.
그는 파킨슨의 법칙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소개한다. 파킨슨은 해군 장교다. 영국에 근무하던 그는 1914년부터 1928년의 기간 동안 함정은 67%, 장병 수는 31.5% 감소했으나, 해군행정인력은 오히려 78%나 증가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영국해군의 조직의 크기나 업무량이 줄어들었음에도 행정인력은 크게 증가한 셈이다(!). 또한 이런 행정인력들은 더 많은 일을 만들어내고 이 일을 하기 위해 또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소개에 흥미를 느껴 이 책을 구매하고 읽어보고 좋아서 독서모임 도서까지 선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좋은 평을 받진 못했다. 내용에 중복이 많다는 의견도 있었고 가짜노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는 이 전제를 이해조차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다면 난 왜 이 책에 꽂혔을까? 바로 내가 가짜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이게 의미가 있나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속으로만 삼켜왔었다. 이런 언사를 밖으로 내뱉었다면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불만쟁이란 평판을 얻었을 거다.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가 천천히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을 보고 알게 됐다. 내가 하고 있던 일이 가짜노동이었음을. 내가 느낀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난 이 책에 열광했던 것이다.
소개를 짧게 해 보자면, 이 책은 제목에 걸맞게 전 세계에 만연한 가짜 노동을 폭로한다. 가짜 노동이란 실질적이지 않은 부차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밭에서 수확을 하거나 요리, 낚시등은 진짜 노동이다.
반면 밭이나 낚시를 할 때 수확이 잘 되나 감시를 하거나 컨설팅을 하는 일이라면 가짜 노동이다. 즉, 내가 서비스를 바로 제공한다면 진짜 노동이고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가짜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짜 노동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다음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된다.
여러분은 실질적인 일을 한다고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 바빠지는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당신은 가짜노동을 하는 중이다. 혹은 하고 있는 일중에 무의미하지 않은가 의심되는 업무가 있나? 그렇다면 가짜노동이다.
내가 회사에서 했던 가짜 노동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두 가지만 꼽아보자면 교육관리와 위험성 평가다.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교육 관리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교육들이 있는지 이때 처음 알았다.
산업안전교육부터 시작해서 대테러교육, 성평등 교육, 보안 교육 등등 그 외에도 수많은 필수 교육들이 존재했다. 이런 교육들은 법적으로도 분기에 몇 시간씩은 필수적으로 받게 되었었다. 산업안전교육의 경우 만약 받지 않는다면 최대 50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터지면 또 거기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아마 이런 사건 발생하면 개선사항을 마련해야 하는데 교육을 받게 하는 게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수단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런 교육받으면 좋지 뭐가 문제지란 생각이 들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해보니 이런 수많은 교육들에 맹점이 있다.
첫 번째는 교육 양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이런 교육을 수료하기 위해선 거의 매일 하루 두 시간은 교육에 할애해야 한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하루 두 시간씩 교육한다면 일은 언제 하나? 어떤 때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교육만 해야 되는 날도 있다. 이런 처지니 실질적인 교육이 이뤄지기 어렵다. 교육은 요식행위에 그치고 모여서 사진 찍는 시간에 불과해진다.
모두가 이런 스케줄이 말도 안 되는 걸 안다. 심지어 감사를 하러 오는 사람도 안다. 하지만 법정 교육은 시간은 채워야 하니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교육 시간이 겹치는 지만 확인하고 이런 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 생각엔 일 년에 몇십 시간씩 받는 것보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강단에 다 보아놓고 실질적인 교육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옛날에 스타벅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시 대표인 하워드 슐츠가 전 지점에 문을 닫고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런 결기를 본받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두 번째 가짜 노동은 위험성 평가다. 위험성 평가에 대한 것을 일단 알고 가보자. 위험성 평가는 산업안전보건법 36조에 아래와 같이 명시되어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36조(위험성평가)
① 사업주는 건설물, 기계ㆍ기구ㆍ설비, 원재료, 가스, 증기, 분진, 근로자의 작업행동 또는 그 밖의 업무로 인한 유해ㆍ위험 요인을 찾아내어 부상 및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의 크기가 허용 가능한 범위인지를 평가하여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이 법과 이 법에 따른 명령에 따른 조치를 하여야 하며, 근로자에 대한 위험 또는 건강장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추가적인 조치를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작업 전에 사장이 이 공정에 대한 위험 요인을 파악하여 근로자가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거 마땅히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 일을 하다 보니 이런 평가에 대한 문제가 보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위험성 평가는 다음과 같이 일련의 과정을 따른다.
1. 전체 공사를 일련의 공정으로 분해한다.
2. 공정을 다시 세부작업으로 나눈다.
3. 세부작업에 대한 위험도 점수를 평가하고 계산한다.
4. 이런 위험도를 총합하여 일정 점수 이상을 나오지 않게 한다. 만약 나온다면 대책을 세워서 점수를 낮춘다.
예를 들어, 고장 난 문 손잡이를 고친다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것을 일련의 공정으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이 될 거다.
1) 수리에 사용할 장비 및 자재를 가지고 현장으로 이동한다.
2) 고장 난 문 손잡이를 분해한다.
3) 새로운 손잡이로 문 손잡이를 교체한다.
4) 자재와 장비를 정리하고 현장 밖으로 이동한다.
이제 여기에 1),2),3),4)에 대해 어떤 위험이 있는 지를 평가한다. 1)을 예로 들면 장비 및 자재를 가지고 가니 이것이 5kg이 넘는다면 중량물 위험이 있다. 거기에 운반하다가 넘어질 수 있다면 전도 위험이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위험 항목들이 있는 데 여기까지 들어가진 않겠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세부적인 위험 항목을 선택해 여기에 위험도 점수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위험도를 총합하여 공정별로 일정 점수 이상이 나오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개선 대책을 세우고 점수를 낮춘다. 이런 식으로 위험성 평가가 행해진다.
이런 작금의 위험성 평가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같은 공기업들은 보통 공사를 발주해서 다른 업체에게 도급을 준다. 그래서 이런 작업에 대한 감독을 하지 실제 작업은 업체 직원이 한다.
그런데 실제로 작업하지도 않은 우리가 위험성 평가를 만들게 되니 당연히 디테일이 떨어지고 현장감이 사라진다. 업체에서 보내온 작업계획서를 참조하긴 하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다. 내 경우는 신입 때 어떤 작업인지도 모르고 상상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두 번째는 위험도 점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m쯤 되는 천장 위를 작업한다고 치자. 아마 안정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서는 발판이 필요하다. 이런 발판에서 작업을 하다가 넘어지거나 떨어질 염려가 있을 거다.
그럴 때 이런 위험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만약 위험도를 상중하로 평가하다면, 어떤 사람은 넘어졌을 때 머리가 다칠 수 있으니 상으로 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해하라고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똑같은 행위를 보고도 담당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위험도가 달라진다. 거기다 높게 점수를 매기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담당자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일이다. 어떤 작업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데 대책까지 마련하라니 막막하기도 할 거다.
세 번째가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점인데 업체에서 위험성 평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몇 년간 공사 감독으로 현장에 나갔지만 위험성 평가를 보고 들어온 반장은 없었다. 아마 이 일을 수년에서 수십 년간 해온 자신의 감을 더 믿는 것일까. 심지어 우리 회사 사람들도 작업 전에 위험성 평가를 보고 가는 사람은 못 봤다.
이런 위험성 평가를 만들고 교육관리를 하는 데 총 하는 일에 삼분의 일은 된다. 이렇게 현업에서 만들고 팀에서 해당 담당자가 다시 검수를 하고 취합해서 위로 보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는지 모른다. 또한 이런 것들도 매년 법이 달라질 때마다 형식과 기준이 달라져 이런 것을 맞추기 위해 또 추가적이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이런 제도들에 대해서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과연 이런 것들로 얼마나 우리 사회가 안전해졌는지 회의적이다. 이런 것들은 법적인 것들을 지켰음에도 사고가 났으니 어쩔 수 없다는 면피용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선 하루 두 명이 산재 사고로 사망한다. 이런 엄중한 현실을 고려할 때 앞으론 안전에 대한 가짜노동이 아닌 진짜노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 직위, 날짜등은 작가가 임의로 변경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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