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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Nov 30. 2023

교보문고에서 미아가 된 사연

실패하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다.

하루에도 서너 갑씩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헤비스모커라 부른다. 적절한 비유일진 모르겠지만 독서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이들을 헤비리더라고 부르겠다.


그들은 하루에도 책을 한 두 권씩 독파해 댄다. 심지어 여기에 읽은 책에 대한 서평까지 쓰는 사람도 있다. 일 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한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가히 돌연변이에 가깝다. 사실 나도 이런 돌연변이다. 일 년에 백 권 정도 보니 헤비리더까지는 아니고 미들 리더(?)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남은 연초가 떨어져 가면 초조해지듯이 독서 중독인 사람도 그렇다. 남아 있는 책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불안해한다. 내가 그렇다. 이런 상태가 되면 나오는 증상들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몇 페이지가 남았나 거듭 세기 시작한다.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초조함은 커져간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책 추천 블로그나 온라인 교보문고를 방황하기도 한다.  

    

어이없는 건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여분의 책이 있다는 점이다. 나만해도 사놓고 한 장도 펴지 않은 책이 열 권도 넘는다. 하지만 옷이 아무리 많아도 입을 게 없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아무리 사도 사도 출근하거나 카페에 갈 때 가져갈만한 책이 좀처럼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급한 대로 온라인에서 책을 주문해 보지만 이것으론 성에 안 찬다. 이쯤 되면 직접 서점에 가야 할 때거 온 거다. 같은 책도 서점에 가서 고르는 거랑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독서란 행위는 책을 읽는다는 것 이상이다. 책뿐만 아니라 그걸 사기까지의 경험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같은 독서 중독자인 아내와 주말에 인천 교보문고에 들렀다. 마침 아내도 한참 전부터 읽을 책이 떨어져 불안감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물론 그녀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열 권도 넘었다.    

 

새로운 책을 살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을 돌아다녔지만 삼십 분째 한 권도 못 골랐다. 아내를 보니 벌써 바구니에 책이 네 권 쌓여있다. 기업 분석 책 세 권에 인간 심리에 관한 책 한 권이다. 요새 HJ가 관심 있어하는 주제들이다. 반면 내 손은 텅 비어 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당혹스럽다.   

  

서점은 나에겐 언제나 설레는 곳이었다. 늘 가도 가도 새롭고 즐거웠다. 여기엔 언제나 나를 유혹하는 새로운 책들이 존재했다. 오늘은 어떤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두근두근 했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와 달랐다. 어떤 책도 고를 수가 없었다.      


항상 가득 쌓아둔 책 무더기에서 뭘 빼지를 고민하던 나에게 뭘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생경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말이 나오지 않고 걷지 못하게 된 기분이랄까.  

    

드디어 나에게도 독서 슬럼프란 것이 찾아온 것일까? 다른 취미를 알아봐야 하는 것일까를 고민하다 지금이 11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쯤 되면 요즘 날씨처럼 내 계좌도 추워진다. 연초처럼 표지가 예쁘다고 사는 그런 호기로운 행위들은 모습을 감추게 되는 때인 것이다.  


이렇게 돈에 쪼들리면 실패에 대한 민감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책보단 많이 들어봤던 눈과 귀에 익은 책들에 손이 더 간다. 특히나 소설은 실패할 위험이 커서 손에 더 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 인간은 친숙한 걸 좋아해서 익숙한 바운더리 안에 있으려고 한다. 진화의 당연한 방향이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려고 독초를 먹는 시도를 한 우리 조상들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다. 나도 이런 조상들의 후손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유전적 두려움이 있다.     

 

그러면 이런 친숙함에 만족하고 살면 될 것 같은데 사람이란 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금세 익숙해진다. 그러면 권태란 놈이 찾아오는데 이놈은 혼자 오지 않고 무기력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온다. 이 둘이 날뛰기 시작하면 무엇을 하든 시들시들해진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이미 한 바 있다. 난 중고등학교 때 반에 꼭 몇 명은 있는 덕후였다. 다양한 분야 중 내 전공은 무협판타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덕질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한창 때는 하루에 여덟 권 이상을 보기도 했다. 내가 현재 네 번 압축한 두꺼운 렌즈를 끼고 있는 이유다.      


이렇게 몇 년간 읽어대다 보니 내가 살던 동네 책방에 있는 모든 판타지, 무협지들을 다 보게 됐다. 그래서 집에서 버스로 이십 분 거리에 있던 당시 무협, 판타지 계의 교보문고였던 비디오 산책까지 가게 됐다. 거기는 동네 책방보다 책이 서너 배는 많았다. 동네 마트만 가다가 처음으로 이마트에 가게 된 거다.   

   

거기서 한동안은 새로운 책들을 탐닉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정체기가 왔다. 책을 고르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처음엔 무얼 보든 재밌었다. 하지만 본 책이 쌓이면서 눈은 점점 높아졌다. 이 책은 저번에 본 책만 못했다.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돈이 많지가 않았다. 한 번 고르면 적어도 삼사일은 이 책으로 버텨야 했기 때문에 실패를 감당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실패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난 장르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고 지금은 거의 읽지 않게 됐다.      


반면 이와 상반된 경험도 있다. 대학교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한 시기였다. 난 공부를 위해서 도서관에 주로 갔었다. 좁은 곳에 있는 걸 답답해하는 성격이라 개방감이 있는 도서관이 나에겐 잘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청라 국제도서관을 많이 다녔었다. 그 당시 내 루틴은 다음과 같았다.

     

1. 도서관에 도착해서 짐을 푼다.

2. 집에서 싸 온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 시간 정도 기사 문제를 푼다.

3. 한두 시간 이상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본다(?)     


취준생의 루틴이라기엔 이상하다. 주객이 전도가 된 상황이었다. 취업공부보다는 독서를 더 열심히 많이 했다. 이런 생활에도 운 좋게 취업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을 했다. 언제 내가 외부적인 조건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내 선호를 위해서 책을 읽어보겠는가.     


도서관이라 책 빌리는데 돈도 들지 않는다. 거기다 도서관에는 책의 위계가 없다. 이 말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대형서점만 가도 알 수 있다. 시내에 교보문고를 가보면 종합 베스트셀러란이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도 그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거기다 일반 매대에 놓여 있는 책들도 무심히 놓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유명한 저자거나 출판사들의 마케팅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곳에 놓인다. 이런 영향력이 적은 다른 책들은 아무래도 구석 귀퉁이에 박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책들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이런 상황은 공평하지 않다. 독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은 다르다. 오로지 이름순으로 정렬된다. 아무리 유명한 고전이나 저자일지라도 이름이 밑에 있다면 아래에 깔린다. 이런 환경 속에서 책들은 위계 없이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내 순간의 관심과 판단만이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된다. 난 여기서 내가 순수하게 당기는 걸 보고 거기서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느꼈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어찌 보면 내 독서 경력 중 가장 큰 자산이다. 이런 경험 덕분에 난 계속해서 독서를 해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건 말로만 도전하라고 하지 사실상 실패를 금기시 여기는 우리나라의 풍조와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실패는 당연하다. 통상적으로 100개를 시도하면 99개는 실패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공한 1개가 실패한 99개를 덮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 비용을 미리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갑자기 실패하면 아프니 심리적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독서를 예로 들어보겠다. 한 달에 네 권을 산다고 치자. 그러면 보통은 베스트셀러나 많이 들어봤던 것들을 고를 확률이 높을 거다. 하지만 이때 한 권쯤은 이건 생소한 분야인데 혹은 돈 주고 사긴 애매한 데 하는 것들을 사보는 것이다.  

    

이때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기억에 남는 책들이 나온다. 내 경우는 스토너가 그런 책이었다. 지금은 스토너란 책이 이동진 작가의 추천으로 유명해졌지만 그전에 아무도 이 책에 대해 잘 모를 때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책이 유명해졌을 때 나 혼자 느꼈던 쾌감이 있다.  

   

이런 즐거움들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우리는 자기만의 내공을 갖게 된다. 타인이나 외부적인 상황에 덜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늘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실패하지 않는 게 진정한 실패야”


맞다 실패하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다. 


Image by Jill Wellingt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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