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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r 28. 2024

내일 죽어야겠다. 떡볶이는 됐어요.

살다 보면 힘든 일 천지다. 어떻게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누워있는 것도 그렇다. 술 퍼먹고 하루 종일 누워 있어 보면 안다. 열 시간 넘어가면 허리 아프다. 하루를 날렸다는 심리적 우울감도 따라온다.      


그래서 요즘은 불금이 아닌 불목이란다. 주말에 숙취로 집에서 괴로워하느니 회사에서 괴로워하는 게 낫다는 거다. 회사는 무슨 잘못인가 싶긴 한데 평소에 우리를 괴롭게 하니 그 정도는 마땅히 받아야 할 응보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렇게 우리 인간은 이렇게 가만히 누워있는 것조차 괴로워한다. 이래서 인생은 고통이라고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했나 보다. 


요즘 이런 고통이 우리나라에 더 만연하다는 게 느껴진다. 쇼펜하우어의 각종 말을 담은 책들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란을 휩쓴다. 뉴스에서는 매일 물가, 집값, 출산율, 자살률 등을 이야기하며 우리 시대 불행을 토로한다.     


그런데 사실 고통은 없었던 적이 없다. 옛날에도 지금에도 존재한다. 나도 그렇다. 친누나는 나를 보고 순탄하게 인생이 잘 풀렸다며 볼멘소리 했지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똑같이 괴로워하며 방황했다. 


초중학교 땐 학교폭력으로 고등학교 땐 대학교 진학에 대해서 고통받았다. 이십 대 때는 아빠의 권유로 간 나랑은 전혀 맞지 않은 전공과 불투명한 내 미래에 대해서 괴로워했다.

      

지금은 회사 일과 내 집마련 같은 재테크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투명해져 버린 내 미래에 대해 괴로워한다. 참 지랄이다. 미래가 안 보인다고 괴로워할 땐 언제고 이제는 훤히 보인다고 괴로워한다. 


인간은 낙원에 가서도 여기 지루하다며 괴로워할 거다. 북유럽애들이 그러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이유를 붙여 괴로워할 거다. 프로 괴로움러다.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삼십 년을 살면서 고통이 만연한 이런 세상을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이 방법은 내 반평생 화두였던 “인생을 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에서 출발했다. 내 십 대와 이십 대 때는 수없이 이 질문에 매달렸다. 어떤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이 질문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찔러댔다. 매번 나는 이 답변에 우물쭈물하는 무능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질문을 안 하게 됐다. 특별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대답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에는 원래 의미는 없는 거고 질문이 잘못됐다는 유시민 아저씨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법륜스님이 말한 왜 사는가를 고민하다 보면 특별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에 필연적으로 자살로 귀결된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왜 살아야 할까? 우리가 죽으면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이 속상하니깐? 근데 그들도 죽고 나면 이런 걱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환경을 위해서라면 이 지구에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우리는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넘기기 위한 유전자 기계에 가깝단다.  

   

이런 마당에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나 싶다. 그렇다고 한 시간 뒤나 내일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갈 땐 가더라도 떡볶이는 먹고 가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난 우리 할머니 떡볶이를 좋아한다. 오징어 통구이 튀김에 떡볶이 국물 찍어먹으면 극락이다.


 잠깐 사족으로 넘어갔지만 그래서 이런 세상에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내가 쓰는 방법은 오늘만 사는 것이다. 특히나 힘들 때 이런 방법은 효과가 좋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토가 날 정도로 이야기를 들은 날에 속으로 항상 생각한다. 오늘만 하고 내일 퇴사해야지. 이렇게 말이다. 정말 단순한데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어떻게든 하루가 살아진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다 보면 조금은 수월한 날도 오고 이런 날들도 넘어가고 다시 고비가 오면 하루만 살고 하다 보면 어느새 일 년이 되고 몇 년이 다돼 간다. 그렇게 이 회사에서 삼 년 동안 버틴 것 같다. 물론 버틸만해야 버티는 것이다. 학대를 당하면서까지 버틸만한 조직은 이 세상에 없다.    

  

훈련소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다. 옛날 말로 공익이다. 공익 훈련소에서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현역보다 훨씬 다양한 것 같다. 뉴스에 대문짝 하게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고(안 좋은 쪽으로) 몸에 문신한 사람도 이때 처음 봤다. 


신기하게도 여기서 만나니 괜찮았다. 훈련소가 편견을 줄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같은 것을 먹고 입고 생활하고 하는 점들 때문인가.      


여기서도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다음에 그냥 친구들이랑 같이 훈련소에 온다는 동기가 있었다. 난 논산훈련소로 갔는데 논산 훈련소의 마의 고비라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널 때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를 보게 되는데 이걸 보게 되면 사회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는 것이다.      


이 친구도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 결심 어린 말투로 그냥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차피 나가서 다시 들어올 거면 지금과 그때가 뭐 다를까 하는 생각에 내일 나가라고 했다.


 오늘 말고 내일 나가라고. 이런 내 말이 먹혔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그 친구는 오늘 훈련소에서 잤고 내일도 그랬다. 그렇게 4주 동안 훈련소에 있다가 집으로 갔다.      


산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특히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더욱 그렇다. 다른 동물들은 살아가면 되는데 우리는 애써서 잘 살려고 한다. 이 ‘잘’이라는 말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인간을 고도화된 문명을 이룰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인간들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지독한 아이러니다.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은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내가 짧은 지식으로 동물들은 미래 개념이 없고 그 순간을 산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동물들의 지혜를 빌릴 필요가 있다. 유독 힘든 날에는 하루만 살자. 


오늘만 하고 내일은 그만두자. 물론 이건 적당히 힘들 때고 많이 힘들면 병원 가라. 정신과에서 상담받고 약도 처방받아 잘 먹자.


Image by LEE DONGH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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