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런 제목을 쓴 것에 대해 모든 소설가들에게 사죄의 말 올리고 글을 시작한다.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고뇌하는지 안다. 또 이렇게 공들여 쓴다 해도 소설로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도 안다.
한때 나도 소설가를 꿈꿨다. 하지만 여러 작품을 쓴 중견 작가도 소설과 별도로 강연 같은 다른 부수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찍이 포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꿈을 완전히 단념하진 못했다. 이렇게 브런치에 소소하게나마 글을 올리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독서는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있다. 뭔가를 쓰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 경험에서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책을 통해서 글감을 수집한다. 나 역시도 그렇고 덕분에 매달 십만 원 이상은 고정적으로 책값으로 나간다.
그래서 교보문고에 종종 간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베스트셀러란도 가보고 아이들 문제집까지도 보는데 이상하게 소설매대 쪽으론 몸이 가질 않는다. 의무적으로 한 번은 가지만 두 번을 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오랜만에 “소설 좀 봐야지”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가도 이상하게 매대 앞에만 서면 뒤적거릴 뿐 좀처럼 사진 않는다. 결국 다음에 살 것을 기약하며 빈 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 가치관을 흔들거나 감정적으로 동요시킨 책들은 대부분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좋았든 나빴든 소설에는 내 추억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대학교 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자유로운 조르바 행동에 감명받아 여자친구와 싸웠다. 이유는 왜 나와 1박 2일로 여행을 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책에서 조르바는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들 때 거슬린다고 엄지까지 자른다. 난 이 행동에 감명받아 그녀에게 부모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떼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억지였고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 다른 건데 그녀에게 내 입장만 강요했다. 또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을 보고 책에 나오는 기구한 가족사에 슬퍼 공원을 돌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 밖에도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이나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등 나를 웃고 울리게 했던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다.
이렇게 내게 강렬한 기억들을 선사해 준 소설이건만 난 배은망덕하게도 서점만 가면 그들을 외면한다. 난 왜 소설 구매를 기피하는 걸까? 분명 싫어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내 성향 탓이다. 난 글을 읽을 때 세부적인 내용 보단 전체적인 플롯을 위주로 본다. 학창 시절 한창 무협지나 판타지를 볼 때 생겨나 지금은 굳어진 습관이다.
그래서 여덟 권짜리 판타지 책을 다 본 후에도 주인공이나 동료 이름, 직위나 지명들이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주인공이 성장하고 악당을 만나서 좌절하고 다시 극복하고 이런 전반적인 스토리 라인만 기억에 남는다.
이런 까닭에 메인 스토리를 알아 버리면 두 번 볼 이유가 없어져 버린다. 이와는 다르게 정보 제공이 목적인 책들은 사면 몇 번은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밖에 못 보는 소설보다는 여러 번 볼 수 있는 책들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다른 장르 책들은 목차만 봐도 어떤 정보와 재미를 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목차를 봐도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 목차만 봐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다 알 수 있는 소설을 돈 주고 찾아볼 사람은 없다. 또 어떤 작가의 책이 재미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작품이 재밌을지는 알 수가 없다.
같은 작가더라도 작품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성향에 안 맞는 책을 고르면 눈물을 머금고 하차해야 한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부터는 무의식적으로 소설 고르는 일을 피하는 것 같다.
영화 범죄도시 4가 천만 관객을 넘은 이유와 같다. 이렇게 사람들이 범죄도시 시리즈를 보러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맛을 내주는 스타벅스처럼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은 어떤 맛이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세 번째는 나와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 책을 고를 때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책을 선택하곤 한다. 그런데 소설은 대부분의 경우 내가 이 세계에 빠져들기가 힘들다. 나랑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니 몰입하기가 어렵고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내가 소설 구매를 꺼리는 이유들을 하나하나 적어 보니 공통점이 있다. 낯설고 불확실한 것을 기피하고 익숙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내 이런 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불확실한 것을 기피하고 확실한 것을 선택하게끔 진화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함의 세계에서 살려다 보니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된다. 이런 식으로는 성장은 없다. 이 세상에는 진리가 있다면 이 세상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생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내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수도 있는 게 세상이다.
그래서 이런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우리 삶에 늘 품고 사는 게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이다. 의도적으로 내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세 권을 사면 한 권 정도는 새로운 분야나 실패확률이 높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이미 쓴 내용이다. 그럼에도 다시 쓴다. 이렇게 적다 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겠지.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