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면접 결과가 발표됐다.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유독 진한 불합격 글씨가 눈에서 맴돌았다. 그 순간 ‘역시 전공면접에서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한 게 컸나?’ ‘아빠가 실망하겠지?’ 등의 생각들이 두서없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모습을 상상했다. 연수원에서 동기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 첫 월급이 계좌에 찍히고 뭘 사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합격 소식에 놀라는 친구들에게 멋쩍은 듯 별거 아니야 말하는 나. 그때 그것들은 분명 나에게 실체가 존재했었다. 아니 이제는 안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유지된다는 사실을.
그동안 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 한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해 최종적으로 현재 우리가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학교교육을 성실히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책 <사피엔스>에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책을 보다 보면 기존의 알고 있던 사실 그 아래에 묻혀 있던 것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내가 달콤하게 상상했던 것들 또한 그렇다. 사실 생각해보면 거대 회사, 월급, 소속감 이런 것들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것들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허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간의 친척에 속하는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협동할 수 있는 숫자는 대략 150명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허구의 신념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수백수천 명 이상이 공동의 신념체계 하에 서로 협력할 수 있었고 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