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엔 근수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내 옆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그와 자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둘 다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야자 후에도 학교 운동장을 뱅뱅 돌며 한 시간도 넘게 떠들었었다. 우리의 주된 대화 소재는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이었다.
그런데 근수에겐 나에게는 없는 특별한 대화 소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였다. 놀랍게도 당시 근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평범 이하의 외모와 작은 키 그리고 남중 남고라는 환경적 열악함을 고려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종종 흥분하며 자신의 열애 담을 이야기했고 여자에 문외한이던 그 당시 나에겐 이 이야기들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런데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던 어느 날 나는 같은 반 친구를 통해 근수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 하나를 알게 됐다. 그것은 근수에게 사실 여자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내가 그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연애사가 전부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저번 주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이야기, 그녀를 위해 미리 영화표를 예매했던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유일하게 진실이 있다면 그녀가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였다.
처음 이 진실을 알게 되고 나는 오히려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지극히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아침에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었던 우리 누나가 사실은 친누나가 아니라는 얘기로 들렸다. 나는 조금은 멍한 상태로 직접 근수에게 이것이 진짜냐고 물었지만 그는 미안하다고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했던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신뢰는 깨졌고 우리의 관계는 멀어졌다. 친구를 통해 들은 얘기로는 지금도 그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한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근수는 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에서 참가자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단계에서 14℃의 물에 60초 동안 한쪽 손을 담갔다 뺀다.(14℃의 물에서 사람은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선 처음 물에 담그지 않았던 손을 60초 동안 동일한 온도의 물에 담그고 있는다. 그 후 온도를 1℃올린 15℃에서 30초 동안 더 손을 넣고 있는다.
세 번째 단계에선 모든 참가자에게 전자와 후자 중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실험을 할 것인지 고르게 한다. 우리는 당연히 전자는 60초 동안 괴로웠고 후자는 90초 동안 괴로웠으니 당연히 전자를 택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정 반대다. 참가자의 80%는 후자를 선택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정점-결말’의 법칙 때문이다. 위 실험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사람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최고점과 최저점의 평균으로 인식한다. 이때 고통의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최고점의 불쾌함이 8점이고 최저점이 7점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전체 경험은 7.5점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후자에서는 최저점이 높아졌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불쾌한 전체 경험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에겐 두 가지 자아가 있다. 책 <호모 데우스>에선 이를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로 구분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우리가 실제로 순간순간을 인지하는 자아다. 찬물에서 고통을 받는 순간순간을 인지하는 것이 경험적 자아다. 그리고 나중에 그 실험 어땠어요?라고 물었을 때 “7.5점이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야기하는 자아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정점과 마지막 순간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를 평가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소설 <문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돈키호테가 망상에 빠진 나머지 현실에서 사람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해 그는 크게 세 가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사람에게 부상을 입혀도 그를 끝까지 풍차로 인식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는 순간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달으며 망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아래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용한 세 번째는 해석이다.
상상 속 거인들과 싸울 때 돈 키호테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환상에 매달리는데, 그것은 자신의 비극적인 범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상 속 이야기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수록 그 환상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그 희생과 자신이 초래한 고통에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412page
나는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근수에게도 세 가지가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자신의 망상을 깊이 믿어버려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가 정말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깊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나에게 침묵보단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사건 후로도 줄곧 거짓말을 해대는 것으로 봐서는 이 것도 적절하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근수의 상태는 세 번째 해석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 이 가장 진실과 가까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로 꾸며낸 세계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그 세계를 포기할 수 없다. 따라서 거짓을 지키기 위해 다른 거짓들을 말한다. 그렇게 그는 거짓의 성에 둘러 쌓이게 된 게 아닐까?
※ 글에서 등장하는 근수라는 이름은 가명입니다.
참고문헌 : <호모 데우스>_유발 하라리
참고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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