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지난 삼 년 동안 매년 적게는 80권 많게는 150권 정도의 책을 봤다. 대부분은 완독 했지만 재미가 없거나 어렵다는 이유들로 책장을 덮은 책도 꽤 많았다.
이렇게 한 책 한 책 포기할 때마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가슴 한편에 남았다. 책 산 돈이 아까웠던 건 아니다. 이런 기분이 들었던 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한다는 내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학생 때도 그랬다. 영어 공부를 할 때도 문법을 마스터한 뒤 독해로 넘어가한다고 생각했고 게임을 할 때도 A구역에 있는 모든 보물상자를 찾고 B구역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이런 내 성향이 독서에도 적용되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동안 읽었던 독서법 책들에서도 읽기 힘든 책도 꾹 참고 읽어 버릇해야 어려운 글을 보는 능력이 생기고 그래야 더 수준 높은 작품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드는 무게를 점점 더 늘려야 근육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꾹 참고 읽었다. 그런데 억지로 읽으려 할수록 독서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새로운 앎에 대한 설렘보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앞섰다.
읽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읽어야 할 것을 읽느라 정작 읽고 싶은 건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 더 이상 독서를 안 하겠다 싶어 그 후로는 어느 순간 읽히지 않는 책들은 바로 덮고 내가 관심이 있는 책으로 넘어갔다.
신기하게도 읽고 싶은 것만 읽으니 독서에 대한 흥미도 살아나고 그전보다 더 많이 읽게 됐다. 독서에 대한 즐거움은 덤이었다. 최근에 봤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에서 아래 같은 구절을 봤다.
43p,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 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 의무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말이네.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 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
재미없는 곳은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밌는 곳만 찾는다는 말은 내게 구원을 줬다. 이어령이라는 당대의 지성이 한 말이라 더욱 와닿았다. 본능적으로 해오던 일에 대해서 이론적 근거를 얻은 기분이었다.
최근 방영했던 프로그램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님께 추천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잘 읽히지도 않음에도 꾸역꾸역 읽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난 이 문장을 보고 바로 힘겹게 읽던 책을 집어 책장에 다시 꽂아뒀다. 그리고 보고 싶었지만, 미루고 있던 책을 서가에 바로 꺼내 보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전 책에서 찾을 수 없었던 가벼움이 정작 책을 덮는 순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어령 교수님 뿐만 아니라 유시민 작가도 읽히지 않은 책은 지금 내가 지금 읽을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안 읽어도 된다고 했고. 배달의 민족 창업자인 김봉진 대표도 본인의 저서 <책 잘 읽는 방법>에서 굳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다.
정리하자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읽다가 안 맞는다면 놓아주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자. 이 세상에 책은 많고 나에게 맞는 책은 어딘가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