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냥이 Mar 07. 2023

여보! 우리 진짜 가야 돼.

“여보! 우리 진짜 가야 돼!”    
 

결국 참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아.. 배우자를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좋은 남편이 돼야 하는데 오늘도 글러 먹었다.   

    


오늘은 독서모임을 하기로 한 날이다. 우리 부부와 내 친구 두 명 총 네 명이 다섯 시에 마곡에서 모이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 보니 우리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HJ와 넉넉하게 세 시 반에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이때까지는 분위기 좋았다. 그런데 시계가 약속시간으로부터 일 분 일 분 흐를수록 내 맘은 초조해져 간다. 



어느새 시계는 이십 분을 지난 세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위와 같은 문장을 내뱉어버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HJ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는 데 열중하고 있다. 십 년 동안 같이 산 눈치로 보건대 필시 머리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와이프가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란생각과 네이버에서 칠십만 원이 넘는 다이슨 헤어드라이기를 사주면 해결될 끼를 잠깐 고민한다.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곤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린 네 시쯤 나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와이프는 내 속도 모르고 웃으며 “안 늦어 괜찮아”라 말한다. 하지만 난 괜찮지 않아 여보.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HJ와는 대략 팔 년 정도 연애를 하고 결혼했는데, 이 때도 늘 시간 약속 문제로 부딪쳤다. 여자친구일 때부터 와이프는 종종 늦었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악심을 품고 한 번은 일부로 늦어본 적도 있지만 아무 상관하지 않는 와이프의 태도에 좌절했던 기억도 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그리고 그 당시 자기 계발 책들 통해 “시간 약속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다”등의 얘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리고 내 이런 태도는 약속 시간에 약 15~20분 정도 미리 오는 것으로 반영되었다.     


 

그런데 내 이런 점은 우리 와이프를 만나면서 극적인 시너지를 일으켰는데, 내가 20분 일찍 오고 와이프가 10분 늦게 오니 30분을 기다리는 일이 생겨버렸다. 


     

30분을 기다리는 동안 난 이미 기분이 상할 때로 상했었고 데이트 시작 전부터 서운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 한 시간 정도는 화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는 일이 많았다.   


  

결혼을 앞두면서도 이 문제는 나에게 나름 고민거리였다. 망상 전문가인 나는 “우리 결혼식에 와이프가 늦으면 어떡하지? 일단 나 먼저 입장을 해야 할까. 우리 부모님 장례식 때도 늦으면 어떡하지?”등 같은 고민까지도 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차에서 와이프에게 늦게 되는 이유가 있는지 슬쩍 물어봤다. 연애할 때는 집안일을 하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본인은 집안일을 안 하면 엄마한테 잔소리를 듣는데 그게 싫었단다. 그렇다고 미리 하기는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해서는 잠깐의 짬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하려다가 그런다고 그랬다. 오늘도 빨래를 건조기에서 빼내고 그것을 개느라 늦었단다. 스스로도 답변이 궁색해 보였는지 와이프 표정이 머쓱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늦으면 뭐라고 안 해?”라고 물었는데, 웃으면서 나한테만 늦는다고 말하는 그녀. 으 너무해. 그럼에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 건 웃는 그녀가 이쁘기도 하고 이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와이프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난 지나친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 일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시작을 안 한다. 예를 들어, 한 시 반에 출발한다고 하면 한 시부터는 아무것도 잡지 않는다. 반면 와이프는 짬나는 시간에 일단 뭐라도 해보는 스타일이라서 한 시 이십 분까지는 무언가를 하고 후다닥 준비해서 가는 거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를 해본다는 점에서 와이프의 이런 장점을 난 높게 본다. 나도 이런 영향을 받아서 인생에 좀 더 많은 시도를 하게 됐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와이프의 영향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는 건 괴롭다. 다이슨 헤어스타일러를 알아보러 가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