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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y 24. 2024

우리는 부모의 삶을 되풀이한다.

결혼 전에는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와 결혼해 살면서 이런 생각이 오만했음을 깨닫는다. 나도 몰랐던 새로운 모습들을 하나둘씩 발굴(?)될 때마다 나란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지란 의구심에 빠진다. 그러다 인간은 스스로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오죽하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까지 있을까.      


물론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내가 같은 면도 있다. 난 이중인격자는 아니니깐. 내가 부드러운 말투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제법 괜찮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다행히도 맞았다. 정말이다. 아내도 동의했다. 그렇지만 내가 외출할 때 집 안 불이란 불은 다 켜고 다닌다는 것과 말을 빼먹고 한다는 점은 몰랐다.      


전자는 깨닫기 어렵지 않았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켜져 있는 불이 보이니 나 스스로도 인지가 됐다. 그런데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눈에 보이진 않았다. 이런 내 특성은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됐다. 


아내는 대화 도중 내 이야기에 추가로 질문을 던지거나 조용해지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내게 주어와 목적어를 다시 물어보곤 했다. 처음엔 내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싶었다. 헛다리였다. 나중에 그녀가 말하길 내가 목적어나 주어를 빼먹고 말해서 그랬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말이 짧다고 들어 본 경험도 없었고 난 내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예를 들어 “여보 어제 회사에서 김 부장이 일을 내 일도 아닌데 갑자기 나한테 일을 시켰어”를 그녀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실제 출력되는 말은 “여보 김 부장이 갑자기 시켰어”다. 


이 얘기를 들은 그녀는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김 부장이 누구에게 뭘 시켰다는 건지 또 왜 시킨 건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화 흐름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그녀는 나에게 다시 묻는다. 혹 그녀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조용해진다. 난 이런 그녀를 보고 “아 내가 또 말을 잘라먹고 했구나”깨닫는다. 결혼 내내 이런 패턴이 계속 됐다. 내 이런 습관을 한 번 깨닫고 나니 그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회사에서 팀장님께 보고를 하고서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을 본 적이 종종 봤다. 그때는 내가 긴장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을 잘라먹고 말하는 내 습관이 그때도 발휘된 게 아닐까 싶다. 


내 이런 점을 가장 많이 느낄 때는 글 쓸 때다. 브런치 초안을 신나게 쓰고 이쯤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다가도 다시 읽어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글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동안은 모두가 다 그래하며 넘겼지만 나에게만 있는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내 습관들은 어디서 온 걸까. 아빠 인가? 아빠는 술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말하는 법이 좀처럼 없다. 아빠는 범인이 아니었다 패스. 그럼 엄마인가. 엄마가 어떻게 말했지 생각해 보니 그녀도 나처럼 뭔가를 빼먹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엄마 문자나 카톡을 보고 이해가 안 갔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신기한 점은 이런 것이 집에서 살 때는 문제가 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문장으로도 말이 잘 통했다. 생각해 보니 그 빈틈을 눈치와 그려려니하는 마음으로 메꾼 것이다. 이런 일은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친누나 둘도 나에게 말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빠를 닮아 말수가 적은 큰누나는 아이가 말이 발달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고민했었고 작은누나는 보고할 때 상사에게 많이 혼났다고 들었다. 아마 나처럼 말을 빼먹고 하는 버릇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같이 사는 아내도 그렇다. 아내는 불만이 있으면 그걸 직접 얘기하지 않고 괜히 툴툴댄다. 처음에는 이런 점 때문에 많이도 싸웠다. 그리고 이 싸움 마지막엔 이런 불만을 직접 이야기하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십 년을 만나 결혼한 지금도 잘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차에서 이런 얘기를 했는데 장모님이 장인어른에게 이렇게 똑같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납득이 됐다.     


결혼을 하고 나와 살면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리적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은 없다. 이렇게 부모에게 물려받은 삶의 방식들이 내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신은 어렸을 땐 깨닫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진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부모의 삶을 반복하고 있음을.


가끔 자신의 뿌리를 찾는 사람들을 볼 때면 굳이 살면 되지 왜 뿌리를 찾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내 이런 점들이 부모로부터 왔다는 걸 알게 되니 마냥 결점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을 가지고도 세상을 꿋꿋하게 살고 있는 부모님 덕분일 것이다. 엄마도 이 세상 잘 살았는데 나도 못 살리라는 법 없다.


꿋꿋이 살아야겠다. 언젠가 내 자식도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 이 글에 나오는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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