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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Apr 16. 2023

당근마켓에서 산 고장 난 모니터


동네 카페에서 책을 보다가 물려서 당근마켓에 들어가 매물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보다가 한 물건에 시선이 멈췄다. 올린 시간은 한 시간 전이었고 내가 평소 사고 싶어 했던 브랜드의 모니터였다. 이걸로 게임하면 부드러운 화면 전환 덕분에 플레이가 더 잘 될 것 같았다. 


새 걸로 사려면 이십만은 족히 줘야 하는 물건인데 11만으로 올라와 있다니 이거 못 참는다. 바로 판매자에게 구매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한 십 분정도 있다가 답변이 왔다. 바로 한 시간 후에 거래 가능하단다. 나이스! 우리 집 근처 역으로 와주신다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니터 뒤에 DIV 출력선이 없다고 해서 그것도 카페 옆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서 샀다. 오후 두 시까지 만나기로 해서 오분쯤 일찍 역으로 걸어갔다.


역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매로 보이는 두 명이 다가왔다. 판매자였다. 인사를 하고 모니터를 받고서 계좌를 물어봤다. 송금하면서 왜 바꾸시는 거냐고 물어봤다. 남자분이 답변하길 FPS게임을 하려고 모니터를 27인치로 바꾸게 되면서 내놨단다. 빨리 가서 해보고 싶은 마음에 설렁설렁 대답하고 송금완료창이 뜨자 인사를 하고 집으로 곧장 왔다. 원래는 헬스를 가는 날이었는데도 안 갔다.      


집으로 와서 기존 것을 분리하고 새로운 모니터에 선을 꽂아 설치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60hz까지는 모니터가 이상 없이 출력이 되는데 그 이상으로 올라가니 화면이 급격하게 깨진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 이런 비슷한 오류가 나오는지 찾은 후 설정을 이리저리 바꿔봤지만 여전히 작동이 안 됐다.    


홈플러스에서 산 선이 문제인 것 같아 근처 컴퓨터 수리점에서 새로운 선을 구매해 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다시 수리점에서 만 오천 원을 내고 검사를 받았는데 모니터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단다.  


큰 기대감이 꺾인 나는 감정적으로 동요가 컸다. 이런 얘기를 와이프와 친구한테 이야기하니 구매자한테 환불요청을 해보라고 해서 당근마켓으로 다시 구매자에게 환불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내가 가져가면서 고장 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환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내 탓을 하니 나도 화가 났다. 팔기 전에 수리점에 확인도 했단다. 좀 이상했다. 당근마켓에 물건을 내놓으면 팔기 전에 확인까지 하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어디 수리점에서 확인하셨는지 물어보니 길 가다가 아무 데나 들어가서 기억이 안 난단다. 이거 냄새가 난다.       


이거 허위 매물이라고 환불 안 해주면 당근마켓에 신고하고 법적조치 취하겠다고 했다. 그렇더니 환불은 해주는데 기름값을 빼달란다.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서 안 된다고 무조건 판 금액 그대로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론 서로를 당근마켓에 신고하고 끝이 났다. 모니터는 아직도 우리 집 현관에 있다. 며칠 후에 당근마켓에선 아래와 같은 문의글을 받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고장 난 걸 스스로 증명하라는 거다.   


최근에 읽었던 허브 코웬의 <협상의 기술>을 보고 이번 일을 겪었던 게 생각났다. 이 책을 보면서 이번 거래를 하면서 내가 놓쳤던 몇 가지들이 보였다.  


첫 번째는 정보다. 나는 상대방에게 이 모니터를 사고 싶어 한다는 ‘정보’를 너무 쉽게 드러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오늘도 가능하다고 먼저 말한 게 그 예다. 이런 점 때문에 다른 제품가격과 비교하거나 선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가격을 낮출 수도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권위다. 당근마켓에서 올려져 있는 가격 제안 금지라는 설정에 기죽어서 11만 원에서 더 깎을 생각도 안 했다.      


세 번째는 말하는 방식이다. 이 책에는 최후통첩하는 방법이 나온다. 이때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언행을 하면 안 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상을 끝내겠다!” 내지는 ‘모 아니면’식의 딱딱한 최후통첩은 자멸로 간다는 길이다. 이 부분을 읽고 찔렸다. 내가 상대방에게 한 행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게 다시 이런 기회가 온다면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내가 그 모니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구매자보다 와이프에게 먼저 연락할 것이다. 이런 이유와 금액대로 구매한다고 말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언제 어디서 만날지 재촉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니터를 강력히 원한다는 정보를 상대방에게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이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한 다음 상대방에게 좀 더 다양한 카드를 줄 것이다. 예를 들어 환불이 아니라면 내가 써도 좋으니 2~3만 원을 더 깎아 줄 수 있냐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모니터를 제조사에 보내서 고장 확인하고 당근마켓에 서로 신고하면 서로 감정이랑 시간 낭비 아니겠느냐 그냥 2~3만 원에 합의 보자는 식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예전에 법륜스님 즉문즉설 듣다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 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부자를 보고 권력에 약한 사람은 자기보다 권위가 높은 사람을 보면 기를 못 편다는 것이다. 물론 속세에 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예 버릴 순 없겠지만 협상 상대인 사람에게 들키지는 말아야겠다.



RODNAE Productions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736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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