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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Jan 15. 2021

라스콜니코프와 장발장

선(善)으로부터 시작한 불법

중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수학 또는 과학을 공부할 때면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뉴턴이 없었더라면 이런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만약, 누군가 타임머신을 만든다면 나는 후배들을 위해 그걸 타고 과거로 가서 뉴턴을 없애버릴 거야.”

“야.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러면 안되지. 후배들도 우리랑 똑같은 고통을 받아야 해. 걔네도 우리처럼 미적분의 고통을 느끼고 물리학을 배우면서 멘탈이 나가봐야 해.”
(당연히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다. 이 대화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작 뉴턴이 현대 과학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쳤는지는 위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가 발견한 과학적 지식들은 가히 현대 과학이라는 나무의 가장 큰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아이작 뉴턴에 대해서 러시아 3대 문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에게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뉴턴이 수많은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기 위해 사람 한 명을 죽여야 한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행동인가? 이것이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면 뉴턴은 정의를 위해 과학의 위대한 발전을 눈 앞에서 놓쳐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그의 저서인 “죄와 벌”의 핵심 주제가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위의 질문에 대하여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제 생각에, 케플러나 뉴턴의 발견이 어떤 복잡한 요인 때문에 그 발견에 방해가 되거나 그 여정에 장애물처럼 서 있는 사람,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백 명이든 하여간 그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면, 뉴턴은 자신의 발견을 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 이 열 명 혹은 백 명을…… 제거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그럴 의무마저 있을 것입니다. (죄와 벌 1 pg.468)”




라스콜니코프는 뉴턴이 위대한 발견과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반드시 이를 행해야 하는 “의무”까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주장을 완벽히 그려낸 사건이 이 책에서 나타난다. 라스콜니코프는 한 술집에서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다.

“그럼 계속 들어 봐. 다른 한쪽에는 지원을 받지 못해 허무하게 스러져 가는 젊고 싱싱한 힘들이 있어, 그것도 수천씩 지천에 널려 있어! 수도원에 들어갈 노파의 돈만 있으면 백 개, 천 개의 선한 일과 기획을 추진하고 손볼 수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 수천의 존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도 있겠지. 수십 개의 가정을 가난과 해체와 파멸과 방탕과 성병 병원에서 구해 낼 수도 있어. 이 모든 것을 그녀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라, 그리고 그 돈의 도움으로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죄와 벌 1 pg.123)”


마침 그 노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위의 대화 내용을 들은 뒤, 그 살인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면서 노파를 찾아가 도끼로 죽이게 된다. “선한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살인이라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의 범죄를 보면서, 나는 마이클 센델 교수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을 읽으면서 배웠던 “공리주의”가 생각났다. 공리주의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사상이자 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라스콜니코프의 범죄는 논쟁할 여지도 없는 “정의”다.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을 콜로세움에 집어넣어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겨나가게 하는 것도 “정의”다. 그것을 본 수 천명의 로마인들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공리주의는 과정(정언론적 윤리)보다는 결과(결과론적 윤리)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의무론보다는 목적론에 훨씬 더 치우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선한 의도를 가진 범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의도”와 “범죄”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사실 라스콜니코프와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아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두 인물 모두 선한 목적을 위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 이후, 장발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갔다. 그리고 팡틴이라는 죽어가던 한 여인을 위해서 그녀의 딸 코제트를 입양하고 평생을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런 장발장의 선행들은 여러 가지 불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딸 코제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왔다. 그의 노란색 통행증을 숨긴 채로 살아왔고, 코제트를 위해 탈옥까지 한 전과가 있다. 심지어 그는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의 동생이라는 신분으로 위조해서 살아간 적도 있다. 이 정도면 중범죄자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러한 범죄의 측면에서 보면 라스콜니코프와 장발장은 정말 많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을 비교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스콜니코프는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장발장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물론 라스콜니코프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데 장발장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아무도 그를 악한 범죄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자베르(그의 직업은 무려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경찰이다)가 더 악한 존재로 느껴지곤 한다. (자베르를 통해서도 정의에 대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전에 “악한 장발장, 선한 자베르”라는 글에서 이미 정리했으니 이 글에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장발장도 범죄자이고, 탈옥수이자, 신분 위조까지 해서 살아가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장발장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발장의 범죄는 용서되고, 라스콜니코프의 범죄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두 인물은 서로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는가?


    비록 라스콜니코프와 장발장(정확하게는 미리엘 주교를 만나고 난 후의 장발장이다), 두 사람의 불법행위는 동일한 근본적인 동기를 갖고 있지만, 더 깊게 내려가 보면 둘은 서로 다른 점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레 미제라블”에는 장발장이 공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 하나 나온다. 이는 곧 공리주의의 신봉자라고 봐도 될 정도의 인물인 라스콜니코프와는 정의에 대한 사상 자체가 달랐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장발장이 경찰을 피해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한 마을의 시장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때에, 갑자기 한 소식이 들려왔다. 장발장과 아주 똑같이 생긴 한 노인이 경찰에 잡혀 진짜 장발장을 대신해서 감옥에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이었다. 아무 죄가 없는 노인의 재판이 열리던 날, 장발장은 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한다. 그에게는 시장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마을과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를 의지했고, 그만큼 장발장의 부재는 마을에 큰 타격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고한 노인 한 명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 직접 가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이라고 자백했다. 만약 라스콜니코프가 이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그는 큰 고민 없이 마을 사람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와 장발장, 두 인물은 불법을 저질렀다. 하지만, 둘의 범죄에 대한 마음의 중심에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마음의 중심이 바로 우리가 라스콜니코프를 악한 인물로 바라보게 하고, 장발장을 선한 인물로 바라보게 하는 중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먼저, 라스콜니코프는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교만함과 비판적 사고체계까지 갖고 있었다. 비록 그는 노파를 살인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심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경찰에게 자신의 살인을 자백하러 가는 순간까지도 그의 살인을 죄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끝까지 ‘그 노파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런 라스콜니코프의 모습이 미리엘 주교를 만나기 이전의 장발장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라스콜니코프처럼 장발장도 처음에는 사회를 향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가 빵을 훔친 행위에 대한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조성한 사회를 향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랬던 장발장을 한 순간에 변화시킨 사람이 바로 미리엘 주교였다. 그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던 범죄자 장발장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귀한 손님들을 대접할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대우했다. 그리고 이런 값진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가 병사들에게 잡혀온 장발장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자신의 가장 귀한 물건인 은촛대를 주면서 정직한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면서 살라고 당부했다. 이 사건 이후로 장발장은 한 마을을 살리는 마들렌 시장으로 거듭났으며, 후에 코제트를 만나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그도 코제트에게 사랑을 주면서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가 장발장의 이야기를 읽을 때, 그를 선한 사람으로 여기며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그의 딸로 입양하기 위해 탈옥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코제트를 더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신분을 위조해서 살아갔다. 즉, 빵을 훔친 것 이외에 장발장이 저지른 모든 불법행위의 동기와 중심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미리엘 주교가 그를 용서했듯이, 그도 자베르 경감을 용서했으며 (이는 그의 안에 있던 복수심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코제트가 마리우스라는 사람과 결혼한 뒤에는 그의 딸이 이제 자신의 곁에서 떠났기에 지금까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생각했고, 결국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범죄를 고백한 뒤에, 죽기 직전까지 혼자서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라스콜니코프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도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그는 “소냐”라는 여인을 통해 사랑을 느꼈고, 그 안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면서 “죄와 벌”의 내용은 마무리가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를 훌쩍 들어 올려 그녀의 발밑으로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 그녀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벌벌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 다 창백하고 여위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죄와 벌 2 pg.496)


“선한 의도”를 가졌음에도 그 과정이 부정하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선한 의도로 시작한 불법”이 옳은 행위인가 옳지 못한 행위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마치 예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완벽한 정의는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죄와 벌” 그리고 “레 미제라블”을 읽어보면 두 작가 모두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앞서서 풀지 못했던 두 질문의 해답은 “사랑”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서적이자 현재의 서양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서적인 성경에서도 정의와 사랑의 밀접한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으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로마서 13장 8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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