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 수사이자 과학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수도원의 한 작은 정원에서의 실험을 통해 “유전법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유전법칙은 시간이 지나 유전의 가장 기초적인 틀이 됨과 동시에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진화론을 부정할 수 있는 중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에 대해서는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 완벽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입증해낼 수 없다. 단지 인간은 유전법칙과 같은 과학적 원리, 혹은 고고학적 요소나 역사적 증거를 분석해서 그것에 가장 걸맞은 것처럼 보이는 가설들을 고안해낼 뿐이고, 그 가설들이 빅뱅이론, 진화론, 그리고 창조론으로 나눠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이론을 넘어선 정설로 여기며 창조론을 허무맹랑한 근거 없는 이야기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추후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진화론까지도 언제든지 뒤집히고 부정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유신론과 무신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이 존재한다”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그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입증해낼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논쟁이 수백 년 동안 끊이질 않는 것이다.
과학적 원리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진화론을 주장한 과학자가 있는데, 바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슨이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라는 책을 통해 인류의 주인은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시작으로 인류가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리처드 도킨슨이 진화론적 방향에서 해석한 생물학적 지식들을 반대로 창조론적 방향, 특히 유신론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리처드 도킨슨이 진화론적 측면에서의 재해석을 통해 모든 과학적 현상들이 무신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것을 유신론적 측면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통해 진화론을 뒷받침한 요소들이 반대로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유전법칙이라는 하나의 지식이 상반된 두 이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생물학적 지식을 재해석하기 이전에, 나는 먼저 이기적 유전자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시 수프 가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원시 수프란 40억 년 전 지구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무기물로 이루어진 따뜻한 연못을 칭하는 단어이며, 이 원시 수프에 생명이 태어나면서 진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바로 원시 수프 가설이다. 어느 시점에 원시 수프 안에 있던 작은 입자들이 우연히 마구 부딪히며 주목할 만한 분자가 생겨났는데, 바로 “자기 복제”를 하는 분자였다. 리처드 도킨슨은 이 분자를 “자기 복제자(replicator)”라고 부르며, 이 자기 복제자의 탄생으로부터 진화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원시 수프 가설에 의하면, 이 자기 복제자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과정 속에서 오류로 인해 불완전한 복제품이 탄생하고, 그 복제품 또한 자기복제와 오류 발생을 반복하면서 많은 생명체가 태어났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정되어 있는 원시 수프라는 공간에 서로 간의 “경쟁”이 탄생하고, 각기 다른 자기복제자들이 더 안정성 있게 복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해내기 시작한다. 경쟁하는 종의 분자를 화학적으로 파괴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단백질 벽을 구축하는 등등의 자기보호능력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서는 자기복제자가 들어앉을 수 있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를 축조해서 그 안에 집단으로 떼 지어 살아가는 형태까지 진화했으며, 이 생존기계가 바로 “동식물”이라는 것과 이 단계까지 다다른 자기복제자를 우리는 “DNA” 혹은 “유전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슨의 주장이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은 단지 자기복제자가 생존과 복제를 위해 고안해낸 다양한 생존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해 배울 때마다 항상 빠지 않고 나왔던 스탠리 밀러의 실험이다.
이러한 원시수프 가설은 약 80년 동안 모든 과학교과서에 쓰여질 정도로 기정 사실화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이미 오류투성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1952년 스탠리 밀러라는 미국의 한 대학원생이 다른 생명체 없이 오로지 환경만을 통해서도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 발생설”을 증명할만한 한 가지 실험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바로 원시시대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무기물들을 배치해놓고 오로지 화학반응을 통해서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것이 원시 수프 이론과 자연 발생설을 증명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199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생명의 기원 학회에서 생물학자들이 밀러의 실험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제기하면서, 결국 그의 실험은 폐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과 “자연발생설 비판”이라는 서적을 통해서 자연발생설은 사실상 완전히 부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원시수프 가설은 실현 불가능한 것임이 연구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원시 수프 가설이 불가능한 현상으로 입증되면서, 그것을 뿌리로 하는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론의 불확실성이 더 커진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과학계에서는 바닷속의 해저 열수구가 생명의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심해 열수구 가설”을 가장 유력한 가설로 여기고 있다. 생명체 탄생의 과정에 대한 연구는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많은 유물 혹은 지형지물을 조사하면서, 그곳에서 나온 정보들에 적용 가능하고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추후에 그 가설을 부정하는 새로운 과학지식이나 유물의 발견에 의해서 가설이 부정되고,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책을 절반만 읽는 것은 안 읽는 것만도 못하다.”
이는 어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동안, 책을 절반만 읽은 사람들은 그 절반을 통해서만 얻는 지식과 생각에 고정되어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독일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향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현실에 비하면 우리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초보적이고 유치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세상의 모든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 한 책이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우리는 지금 그 책의 절반은커녕 10%도 완전히 이해하거나 습득하지도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서 논쟁하는 것 또한 책의 10%만 읽고 앞으로의 책의 내용이 어떠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즉, 온전히 지식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우리가 “자연과학”의 단 10%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떤 것이 맞는 이론이라고 확정 짓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며 이런 상황 속에서 창조론이 비과학적인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어떻게 보면 너무 무책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라는 책의 모든 부분이 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 창조론이 과학이라는 책 바깥에 있는 내용인 것처럼 말이다. 진화론과 창조론 중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깨닫기를 원하는 현대 사회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이러한 방식의 “동일선상에 놓이지 못한 두 이론”은 진리 추구의 장애물이 될 뿐이다.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이 단순히 유전자의 생존기계일 뿐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육체적, 심리적 행위들의 뿌리는 유전자의 생존본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따라올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인간은 생물학적 주인, 즉 유전자에 의해서 일거수일투족이 조종되는 모습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인가?’
사랑, 희생, 정직, 그리고 각자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 모습을 보았을 때, 인간이 어떤 존재에 의해 제어되는 모습처럼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리처드 도킨슨은 “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책에서 체스를 두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 프로그래머가 체스를 두는 인공지능을 만들 때, 그 프로그래머는 체스 말의 모든 가능한 위치를 예상하고,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 경우에 대비하여 그 경우에 좋다고 생각되는 수들을 컴퓨터에 하나하나씩 입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기에는 체스라는 게임에서 만들어지는 각 말의 가능한 위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머는 “비숍은 대각선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와 같이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들만 가르치고 거기에 더해서 “킹을 무방비 상태로 두지 말라”와 같은 어느 정도의 충고와 특정한 전략법만을 입력해놓는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슨은 이 예시를 들고 나서 “유전자 역시 인형을 직접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간접적으로 자기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에 일일이 명령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최소한의 명령과 충고만을 입력한다는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가면 쫓아가고, 그가 보복해 오면 도망쳐라.”와 같은 것이 입력되어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유전자의 자기복제에 필요한 아기를 보호해라.”와 같은 것들이 입력되어 있으며, 그 입력된 것들이 “모성애”와 같은 심리적 상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기적 유전자론의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위의 질문을 창조론적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이전에 했던 질문은 창조론적 측면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신은 인간의 악한 행위와 생각들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선하다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는 악한 모습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비극이 나타나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과 인간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영국의 문학가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알려진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이 특정한 존재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유 의지(free will)”라는 용어를 꺼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인간이 옳은 일을 할 수도, 혹은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pg.86)
그렇다면 왜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C.S. 루이스는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이 줄을 잡아당겨야만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의 세상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이 진짜 선을 행하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세상,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신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자유가 없는 사회를 아주 완벽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러한 세상과 반대로 자유 의지가 제공되지 않는 세상을 영국 출신의 또 다른 작가가 그려낸 적이 있는데,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직업, 지위와 같은 모든 사회적 위치가 정해진 채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각자만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불평이 생길 수 없도록 심리적, 육체적 상태가 조작된 상태로 살아간다. 이 사회에서 그들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를 포함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제한되어 있으며, 모두가 이미 충분한 쾌락을 누리고 있기에 더 이상 발전이나 변화에 대한 고민을 전혀 갖지 않고, 서로 간의 다름 또한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멋진 신세계에 대항하는 한 등장인물이 이런 말을 남겼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협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멋진 신세계 pg.363)
신이 세상의 위협이나 죄악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했다면, 이 세상은 사랑이나 행복의 가치를 알 수 없는 멋진 신세계처럼 되었을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인간에게 도덕, 양심, 윤리, 그리고 사랑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이나 충고만을 입력해놓고 그들에게 자유로운 삶을 허락하는 존재는 어쩌면 유전자가 아닌 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순히 지능을 더 갖추었을 뿐 다른 동식물과 다를 바 없는 간접적으로 창조주에 의해 제어받는 생물체인가? 또 그것이 맞다면 과연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 어떤 차이점이 있기에 비교적으로 더 크고 빠르게 번창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진화론적 답변으로 리처드 도킨슨은 밈 (Meme)이라는 용어를 가져왔다. 이는 유전자와 함께 진화 과정에 개입하는 자기복제자의 한 종류인데, 유전자가 생물학적 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할 동안, 밈은 모방의 형태로 생각이나 신념 등을 전달한다. 스승으로부터 배워 또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지식이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용어, 그리고 각 지역별 문화가 그 예이다. 리처드 도킨슨은 밈이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자기복제자이자 인간이 창조주를 향해 대항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신부나 스님이 결혼을 하지 않는 행위나 공동체 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몇몇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는 인터넷과 책의 대중화를 통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갖는 생각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생물학적 정보를 복제하는 유전자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밈이 지식의 형태를 띠면서 복제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바로 리처드 도킨슨의 진화론적 해석인데, 그렇다면 반대로 창조론에서는 인간과 동식물의 차이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동물들도 그들만의 방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뿐만 아니라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까지도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수준 높은 지능을 가진 고등 동물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 현재의 지구의 모습이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유신론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성경에는 신이 인간을 땅의 모든 생물체를 다스리고 관리할 존재로서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 (image of God)을 따라서 창조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이 신의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영화나 만화에서 보는 신의 모습과 달리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신은 육체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카를 바르트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형상이 눈, 코, 입, 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은 외형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형상” 또한 인간의 외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형상, 즉 인간만이 부여받은 독특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지만 그중에서도 크게 두 가지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째는 바로 인간의 “지성”이다. 이는 단순히 고등동물들도 갖고 있는 지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나뭇가지와 같은 자연에 있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그것들에 가치를 매기는 능력, 즉 “창조성(creativity)”을 갖추고 있다.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드는 이 창조성이라는 능력은 이전에 없던 세상을 창조한 신의 형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성에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moral consciousness)”도 포함된다.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윤리성”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이를 옹호한다는 듯이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If God does not exist everything is permitted.)”
즉, 인간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성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인 윤리성은 단순히 반복적인 진화로 인해 생겨난 생존본능의 일종이 아니라 창조될 때부터 인간만이 신으로부터 받은 지성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창조될 때에 인간만이 부여받은 두 번째 특징은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성”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땅, 즉 보이는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은, 신의 호흡, 신의 영이 들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육체”를 갖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다른 어떤 피조물들과 달리 땅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 모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도 속하는 것의 반응으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적인 존재와 소통하길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지금의 “종교”라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지구에서 인간 이외의 그 어떤 생물체도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전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중이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다.’라는 하나의 견해가 두 가지의 상반되는 해석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결국 현대 사회가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 논쟁을 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향”의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현대사회의 모습은 논쟁과 해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처드 도킨슨의 “밈”은 물리적 실체이자 살아있는 구조로 여기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고 생각과 문화를 밈이라는 살아있는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이 부적격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에 반대되는 창조론의 “영혼”이라는 키워드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질타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설이 여러 가지 실험과 증거에 의해서 입증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이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론이라고 해서 비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론이 가설에 비해서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 때로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행해진 실험에서 오류가 발견되기도 하고, 앞서 얘기했듯이 그 실험에 대한 해석이 비난받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뱅이론과 같은 특정한 이론들이 여러 교과서에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인 과학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지금 현대사회의 교육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확실하지 않은 이론을 단순히 더 그럴싸해 보인다는 이유로 교과서에 넣은 뒤, 학생들에게 그 이론을 “정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론과 진화론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어쩌면 "과학"만의 이야기 또한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해석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가설을 똑같은 출발선에 두고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