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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ec 01. 2020

고전 명작을 읽는 방법

햄릿이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유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 알려진 인물이자, 이제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의 인물이 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향하여 영국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영국인들 뿐만 아니라 제인 오스틴,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은 사람들도 그를 향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영단어들은 자연스럽게 현대 영어에 없어서는 안 될 단어가 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여러 방법을 통해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막상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이상한 줄거리와 더 이상한 결말에 쉽게 당황하곤 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이 문과 감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에게는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 가장 줄거리와 결말이 이상했던 작품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사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질문을 해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햄릿”만큼 줄거리가 막장인 작품은 많이 없다. 그러나 책, 특히 고전 명작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줄거리와 결말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고전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작용 안에는 항상 상징적 의미나 삶의 교훈을 내포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의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고전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책의 주인공인 햄릿 왕자에 대해서만 깊게 들어가 볼 생각이다. 그 이외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독자들이 직접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햄릿”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햄릿 왕자의 복수극과 그로 인한 대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명예욕이나 물질욕은 없는 상태였으며 애초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삶에 대한 의미조차 찾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햄릿이 그의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 아버지가 자신의 동생인 “클로디우스”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이후로부터 햄릿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삶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로디우스에게 복수를 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 햄릿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고 반복적인 충돌을 하게 된다. 클로디우스와 결혼을 한 어머니를 원망했고, 클로디우스의 신하인 폴로니우스를 조롱했으며, 레어티즈를 계속해서 경계했고, 그의 동창생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햄릿의 이러한 모든 행동들의 특징은 바로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햄릿은 이런 상태가 된 것일까? 그것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햄릿의 “자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햄릿은 항상 교만했고 비판적 사고체계를 갖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행위를 비판했고, ‘나는 너의 ~가 싫다’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바로 우선순위의 차이이다. 그의 삶의 우선순위의 정점에는 “복수”가 있었고, 이것이 그가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게끔 만들었다. 복수심과 비판적 사고체계에 눈이 먼 햄릿은 상대방이 무슨 비극에 처하든지 ‘그래, 저놈은 저렇게 될 운명이었어’라고 합리화를 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햄릿의 상태는 폴로니우스의 죽음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어머니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비난을 하던 와중, 햄릿은 그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던 폴로니우스를 칼로 죽이게 된다. 그러나 햄릿은 그의 죽음을 보며 이를 인과응보라 생각하면서 죽음을 당연한 결말로 여기고, 죄책감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된다.

“너 간사하고 경망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바보야, 잘 가라. 나는 너를 네 상전으로 알았구나. 운명을 받아들여라. 너무 바삐 서두르다 보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니. 자, 어머니 손 비비 꼬는 것은 그만두고 가만히 앉으세요. 이제는 어머니의 심장을 비비 꼬아 드릴 겁니다. 빌어먹을 습관이 강철처럼 굳혀 놔서 감정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요새만 아니라면 내가 뚫고 들어가 후벼 놓을 작정입니다… 염치라는 곱고 수줍은 얼굴을 망치고, 미덕을 위선이라 부르고, 순진한 사랑의 아름다운 이마에서 장미꽃을 떼낸 자리에 창녀의 딱지를 붙이고, 사랑의 맹세를 도박꾼의 맹세처럼 사악하게 만들어 버린 그런 행동을 했지요.” (햄릿 제3막 제4장 중에서)


햄릿은 폴로니우스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어머니를 비판하기에 바빴다. 그로부터 며칠 뒤 폴로니우스의 딸이자 햄릿의 사랑하는 여자인 오필리아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후 미치게 되고 강물에 빠져 죽게 된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도 햄릿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는 것에 대한 슬픔은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햄릿이 클로디우스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명예와 물질이라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고 그것에 눈이 먼 클로디우스가 그의 형을 죽인 것처럼, 햄릿도 복수라는 우선순위에 눈이 멀어 무고한 클로디우스의 신하들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클로디우스의 살인이 햄릿의 복수를 낳았듯이, 햄릿의 살인도 또 다른 이의 복수를 낳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오필리아의 친오빠인 레어티즈였으며, 결국 마지막에 두 사람 모두 칼부림을 하던 와중에 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보았을만한 이 그림의 제목은 "오필리아(Ophelia)"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결말과 줄거리 요약만 본다면 햄릿은 정말 막장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나온 햄릿의 행동들을 보면서 ‘왜 햄릿은 저런 행동을 했을까?’라는 질문만 해봐도 우리는 교만함, 비판적 사고체계, 자기 합리화, 그리고 복수가 어떤 결과를 갖고 오는지에 대한 답까지도 찾을 수 있다. 또한 나는 햄릿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서로 간의 사랑이 삶의 최우선 순위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만약 클로디우스가 형을 향한 사랑을 그의 세상적인 욕심보다 위에 두었다면?
만약 클로디우스가 자신의 죄를 햄릿과 거트루드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둘도 사랑으로 그를 용서했다면?
만약 햄릿이 오필리아를 향한 사랑을 우선순위에 두며 그녀를 계속 사랑하고, 폴로니우스의 죽음에 오필리아와 레어티즈 앞에서 용서를 구했다면?


이런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해볼 때, 나는 또 햄릿이라는 한 고전을 통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전을 읽으면서 해봐야 할 것은 줄거리 속에서 항상 “why(왜)”라는 질문과 “What if… (만약에 이랬더라면…)”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보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고전 명작의 가치를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며, 생각의 단계도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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