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나를 본다: 숏폼 시대의 자아 성찰(2부)

by Ehecatl

2부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가

4장 갈등과 혼란 : 숏폼 중독과 내적 공허함


진정성을 갈망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이 곧바로 나를 바꾼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그 깨달음은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혼란을 안겨주었다. 마치 몸에 해로운 음식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손이 가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숏폼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제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손은 이미 습관처럼 앱을 누르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중독에 가까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찾았다. 밤이 되면, 분명 오늘 할 일을 다 끝냈는데도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끝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내 머리는 온갖 밈과 챌린지, 그리고 15초짜리 요리 영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내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영상이 끝나는 순간마다, 나는 이 모든 시간이 어디로 증발해버렸는지 알 수 없어 허탈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숏폼이 주는 가장 무서운 중독은 '도파민'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을 자유'였던 것 같다. 우리는 숏폼을 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심지어 지루함까지도 찰나의 영상으로 손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과 멀어졌다. 내 안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심지어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숏폼은 우리가 스스로의 공허함을 직면할 기회를 빼앗아갔다. 예전에는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공상에 잠기거나, 그동안 미뤄뒀던 내면의 고민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틈이 생기자마자, 습관처럼 숏폼을 켜서 그 공백을 메워버린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성찰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감정의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얕은 즐거움과 충동적인 자극만이 쌓여갔다.


결국 나는 숏폼이라는 거울 속에서 나를 보았지만, 그건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정작 나의 내면은 외면한 채 공허해져 가는 나의 초상화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진정성을 갈망하면서도, 가장 쉽게 진정성을 잃어버리는 길로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5장. 타인과의 만남 : 관계 속에서 길을 묻다


내 안의 공허함을 깨달은 뒤,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숏폼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봤다면, 이제는 그 거울을 통해 우리가 맺는 관계들을 비춰볼 차례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글쎄,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다. 정말 반가웠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우리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갖 유행하는 챌린지와 밈, 그리고 흥미로운 짧은 영상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문득, 내가 이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과연 재미있을지, 유익할지 알 수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사는지 몰라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사람에게는 매일같이 소통하며 '좋아요'라는 칭찬을 건네면서, 정작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오늘 옷 멋지다'는 말을 해주는 게 왜 그리 어색했을까.


숏폼이 만들어낸 관계는 얇은 유리벽이 아니라, 사실 두꺼운 방탄유리벽과 같았다. 서로를 볼 수는 있지만, 절대 만질 수도, 깊이 교류할 수도 없었다. 그건 일방적인 소통에 가까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글을 쓰지만, 그 글을 그가 읽어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맛있는 부분만 빠르게 소비하는 습관은 나에게도 깊이 배어들었다. 평소 즐겨 보던 드라마나 재미있는 영화조차도 짧게 요약된 영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책장에 꽂힌 고전들은 먼지만 쌓인 채 펼쳐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나에게 깊은 혼란을 가져왔다. 우리는 왜 타인과의 깊은 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얕은 관계에 매달리는 것일까? 숏폼이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놓은 것 같았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의 교류 대신, 짧은 '좋아요' 한 번으로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깊은 대화를 나누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보다, 누군가의 15초짜리 영상을 보며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게 훨씬 쉬웠으니 말이다.


나는 이 혼란의 길 한가운데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타인과 제대로 만나고 있는가?" 답은 "아니오"에 가까웠다. 숏폼은 나에게 수많은 연결을 선물했지만, 동시에 나와 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대상은 얄팍한 화면 속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그 화면 너머에 있는 진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6장. 새로운 시각 : 복합적 감정의 소중함


나는 얕은 관계 속에서 길을 잃어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지 '소통의 깊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복합적인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숏폼은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감정만을 선사했다. 웃음, 놀람, 분노 같은 것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한 가지 감정으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끔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다가 옛 친구의 사진을 발견할 때가 있다. 사진 속 우리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웃음과 동시에 묘한 슬픔을 느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이는 것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감정은 단 15초짜리 영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호흡과 깊은 사유를 통해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인간만이 지닌 감정의 영역이다.

나는 우리가 숏폼에 중독될수록, 이러한 복합적 감정을 불편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 공허함, 슬픔, 혹은 무언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감정은 즉각적인 해답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들이 찾아올 때마다 스마트폰을 켜고, 명확한 웃음과 단순한 자극으로 그 감정을 덮어버리려 했다.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는 대신, 더 단순한 감정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복합적인 감정들이었다. 기쁨 속에 숨은 슬픔, 성공 속에 담긴 외로움, 그리고 포기 속에 싹트는 작은 희망 같은 것들. 이런 감정들은 우리를 더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숏폼이 주는 찰나의 쾌락은 일시적이지만, 삶의 고난을 통해 얻은 감정의 깊이는 영원히 우리 안에 남는다.


나는 숏폼의 바다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나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해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삭막한 내면에서도 여전히 복합적인 감정들이 꿈틀대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그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들을 다시 되찾는 것, 그것이 바로 다시 나를 찾아가는 첫 번째 여정의 시작이었다.


3부: 다시, 나를 찾아가는 여정

7장. 변화의 시작: 관계의 깊이를 더하는 콘텐츠의 힘


복합적인 감정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숏폼을 아예 보지 말아야 하나? 그런 극단적인 방식은 내게 맞지 않았다. 나는 이 복잡한 디지털 세상 속에서, 나와 타인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이를 인식하고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재미있고 자극적인 영상만 찾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좀 더 진솔하고 깊은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을 담은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정보나 웃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고민과 감정을 온전히 느껴보고자 했다. 답답함이라던가, 당연한 듯한 예측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인지, 그리고 그게 정말 당연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과거 문학을 다루던 옛 예술가들은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에 더 담을 수도, 덜 수도 없을 때까지 고뇌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고뇌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정말 진정성이 아닐까? 찰나의 소비를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 되어주는 콘텐츠. 나는 바로 그런 콘텐츠의 힘을 통해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세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 콘텐츠를 혼자 소비하는 대신, 누군가와 나누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친구에게 '이거 봐봐, 대박 웃겨!' 하고 무심하게 밈 영상을 보냈다면, 이제는 이 영상을 보면서 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질문은 새로운 관계의 문을 열어주었다. 친구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나는 그 답변에 또 다른 나의 생각을 덧붙였다. 숏폼이 만들어냈던 침묵과 단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그 콘텐츠를 다리 삼아 깊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변화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작은 선택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잃어버렸던 나의 내면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타인들과도 진정성 있게 연결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8장. 실천과 적용: 느림의 미학을 위한 작은 노력들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던 그날의 뿌듯함은 오래갔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성공이 습관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행동 패턴을 바꾸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이 싸움이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아주 작은 노력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영상보다 활자로 습득하고자 했다. 손에 잡히는 종이책을 펼치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는 연습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불안했다. 활자가 빼곡한 페이지를 마주하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뇌가 빠른 자극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글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 다른 생각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 잡념들을 밀어내고, 내가 읽고 있는 활자에 오롯이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심을 내렸다. 나는 더 이상 숏폼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스크롤을 멈추는' 노력을 했다면, 이제는 아예 쇼츠나 릴스에 접근하지 않기로 했다. 마치 몸에 나쁜 음식을 끊는 것처럼, 내 영혼을 좀먹는 습관과 단호하게 이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결정은 나에게 큰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찰나의 자극에 연연하지 않게 되자, 내 마음에는 조금씩 여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여백의 시간 속에서 나는 그동안 놓쳤던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다. 햇살이 창문에 부서지는 모습, 사람들의 무표정 속에 숨겨진 작은 감정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생각의 조각들.


이 모든 노력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실천들이야말로 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빠르기만 한 세상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느림의 미학'이었다.


9장. 현재의 나: 그럼에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8장에서 이야기했던 해결책들, 가령 종이책을 읽거나 쇼츠를 아예 보지 않는 노력들은 사실 세간에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평범한 방법들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아주 작은 성공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꽤 만족스러운 현재의 나를 마주하고 있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손에서 완전히 놓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몰입하지는 않는다. 나를 비우는 시간이 곧 나를 채우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오랫동안 외롭다고 생각했었다. 수많은 팔로워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과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숏폼 대신 독서 모임에 참석하여 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내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하지 못해 버벅이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솔직한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내 고민과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얕은 스크롤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감정의 교류였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진정한 소통은 '좋아요'나 '댓글'과 같은 피드백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과 생각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숏폼이 주는 일방적인 정보 소비가 아니라, 쌍방향으로 오가는 진솔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빠르고 단편적인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즉 진정성 있는 관계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갈망은 마치 어두운 숲 속의 작은 불빛처럼, 내가 다시 나를 찾아가는 길을 밝혀주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모든 혼란과 노력의 끝에, 나는 여전히 이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나만의 속도를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진정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수도 없이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숏폼 콘텐츠의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그것은 결국 내 안에 숨어 있던 공허함과 혼란을 마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빠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빠르게 정보를 얻고, 빠르게 소통하며, 빠르게 즐거움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갔습니다. 깊은 사유의 시간, 복합적인 감정의 소중함, 그리고 진솔한 관계의 가치 같은 것들. 이 책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을 찾아가는 나의 개인적인 여정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당신의 영혼이 허기진 상태는 아닌지. 잠시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당신의 마음이 어떤 감정으로 채워져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짧은 영상처럼 편집될 수 없으며, 모든 순간이 하이라이트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이 여정은 끝이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 복잡한 디지털 세상 속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나만의 속도를 찾았고, 내 안의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는 나를 봅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솔직한 나의 모습을. 이 책이 당신에게도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어, 당신의 오늘을 온전히 마주하는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는 결국, 다시 연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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