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개인의 나약함에 대하여

by Ehecatl

우리는 정말 쓸모없어지는 걸까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이 글은 그 불안에서 시작됐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 가슴 한쪽이 조여왔다.

나의 일을 AI가 모두 대신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이미 AI 안에 완성되어 있는 건 아닐까. 세계는 이제 나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

실제로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 AI는 분업화되고 상세한 업무, 패턴화된 작업뿐만 아니라 추론까지 가능해져 인간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두려운 것은 이것이다. 요즘 거론되는 AI 시대의 인간 역할이란, 결국 "최종 책임"과 "새로운 아이디어 발굴" 정도인데, 그마저도 AI가 점점 잠식해가고 있다. 만약 인간에게 남는 것이 책임뿐이라면, 우리는 이름만 빌려주는 바지사장으로 남게 되는 것 아닌가. 보증만 서는 시대가 온 것 아닌가.

너무나 많은 두려움이 우리 삶에 존재하고 있다. 힘이 약한 개인은 이를 넘지 못할 것 같고, 내가 쌓아온 지식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린 아직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유는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관에 있다.

우리의 이전 세대는 비교적 예측 가능한 성장의 시대를 살았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일정 부분 성장하면 루틴하게 별일 없이 올라가는 완벽한 성공 스토리. 대기업 부장으로 퇴사해 안락한 노후를 즐기는 인생의 정석. 그러나 그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문제는 이 신화를 과거 세대가 후대에 물려주어 환상을 심고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에 맞춰 기술과 전문성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학습해온 것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왜?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하나의 진입장벽이었는데, AI가 누구나 쉽게 그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그 벽을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본성이 겹친다. 우리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원한다. 예측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그 위에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래를 더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AI가 오히려 지금 우리의 미래를 가장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AI는 우리의 삶을 붕괴시킬까

AI가 잘하는 영역은 분명히 있다. 계산, 이미지 생성, 전문적인 법률 해석, 세무 처리. 인간이 "이것만큼은 AI가 넘을 수 없다"고 믿었던 영역들 — 예술, 법의 해석, 논리적 추론 — 에서조차 AI는 인간과 충돌하고 있다.

뛰어난 전문가도 대체되고 있는데, 평범한 내가 대체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이 불안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가 우리를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라, "대체되지 않는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로.


인간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가 있는가

AI가 모든 일을 다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인간 그 자체로 어떤 효용이 있는가? 인간은 매트릭스처럼 배터리로 활용되는 존재인가? AI가 인간을 효율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미래가 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세계의 석학들은 공통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로 '의식'을 꼽았다. AI가 지능을 넘어 의식을 보유했다고 가정해도 육체는 가질 수 없으며, 인간만이 육체를 통해 경험과 깨달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코딩보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조언하면서, 동시에 "사람에게는 소득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존중받고 명예를 얻으며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1958년 『인간의 조건』에서 이 문제를 예견한 듯한 통찰을 남겼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나누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고, 작업은 세계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며, 행위는 타인과 관계 맺고 소통하며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현대인의 문제는 모든 활동이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AI가 노동과 작업을 대체하는 시대에, 아렌트의 '행위' — 자발적으로 삶의 가치를 찾고 타인과 관계 맺는 일 — 야말로 인간에게 남은 고유한 영역이 아닐까.

철학자 토비아스 리스는 AI의 등장이 400년간 유지되어온 인간-기계의 구분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진단하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마르타 누스바움은 비판적 사고와 공감 능력 — AI가 복제할 수 없는 것들 — 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간성의 기반이라고 역설한다.

이들의 논의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다. AI가 잘하는 것은 "어떻게(How)"의 영역이다. 하지만 "왜(Why)", "무엇을 위해(What for)"라는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어떤 목표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지, 어떤 트레이드오프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철학적 성찰이며,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이 맥락 위에 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목적의식이다. "이것을 하겠다"는 의지, "이 방향으로 가겠다"는 욕망. AI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우리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며,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의 존재는 AI가 있어서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해 더 빛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관점을 바꿔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제 AI를 통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영역에 도전할 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과 개인이 원하는 것이 일치할 때에만 그 활동을 가치 있다고 인정해왔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 일은 가치 없는 일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직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의미 있다고 믿는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공동체를 해치는 방향이라면, 반드시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비판자가 많아야 한다

여기서 "비판자"라는 말을 좀 더 풀어야겠다. AI를 적으로 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AI가 내놓는 결과물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AI가 쓴 글을 그대로 쓰고, AI가 내린 판단을 검증 없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의 쓸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비판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 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맹목적 신뢰도, 맹목적 거부도 답이 아니다. AI의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내고, 그 과정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것 — 그것이 내가 말하는 "비판자가 많아야 한다"의 의미이다. 하라리도 같은 맥락에서 "AI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라며, AI를 먼저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은 거부가 아니라 이해의 시작이다.


장기적 인류 프로젝트에 눈을 돌리자

비판적 시선을 확보했다면, 그다음은 방향이다. 불가능한 영역에 도전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이제 장기적 인류 프로젝트들을 실행할 때라고 생각한다. AI로 목표를 정렬하고 실행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과거에는 꿈에 불과했던 것들이 현실의 과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불안한 개인이고, 지금 당장 이런 프로젝트를 주도할 위치에 있지 않다. 하지만 불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류가 풀지 못한 것들, 그중에서 내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를 들어, 지구의 유한한 자원 문제를 생각해보자. 석유, 희토류, 담수 — 이것들은 언젠가 바닥난다. 지금까지 이 문제는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이나 거대 기업의 R&D 영역이었다. 개인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AI가 이 구조를 바꾸고 있다. 개인이 AI를 활용해 공개된 자원 데이터를 분석하고, 대체 에너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자원 소비 패턴의 비효율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다. 전문 연구자가 아니어도 "이 자원이 언제 고갈되고, 어떤 대안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긴 것이다.

자원의 분배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계에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 곳과 굶주리는 곳이 공존한다. 이 불균형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AI는 물류 최적화, 수요 예측, 낭비 지점 탐지에서 이미 성과를 내고 있다. 한 개인이 자기 지역의 식량 낭비 데이터를 AI로 분석해서, 잉여 식량을 필요한 곳으로 연결하는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작은 시작이 모여 분배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이 외에도 영생, 테라포밍, 전쟁의 종식, 우주 탐사, 사후 세계의 입증 — 인류가 늘 꿈꿨으나 도구의 한계로 접근하지 못했던 과제들이 있다.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프로젝트가 소수의 천재나 거대 기관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도 이 과제에 기여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런 분야는 개인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연구 인프라, 자금, 전문 인력의 벽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AI가 그 벽을 낮추고 있다. 인류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도전하고 싶다는 열망 — 이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잠재된 동기이다. 이런 개인들이 각자의 관심과 열망을 가지고 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과제에 대한 기여가 된다.

핵심은 인식의 전환이다. "AI가 나를 대체한다"가 아니라, "AI와 함께 내가 접근하지 못했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로. 이 인식의 차이가 개인의 잠재된 동기를 이끌어내고, 불안을 방향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다.


과감한 도전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장기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기존의 윤리적 프레임워크만으로는 답을 내기 어려운 영역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인간 개조, 영생, 의식의 디지털화 — 이것들은 지금의 도덕적 틀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주제들이다.

그렇다고 도덕성을 내려놓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런 과감한 도전들이 점차 인류의 현실적 과제로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윤리를 지키면서도 이런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도전에는 공학적 접근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철학적, 인문학적 성찰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 한다면 어떻게"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

여기까지 쓰면서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개인이 아무리 각성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조직과 정부가 이런 장기적 인류 프로젝트를 장려하고,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일에 드디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이는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AI가 각 개인에게 맞춤형 역할을 제안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당신의 관심사와 역량이라면, 이 프로젝트에 이렇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런 세상이 온다면 꽤 근사할 것이다. 다만, 그때에도 최종 선택은 인간의 몫이어야 한다. AI가 제안하되, 결정은 내가 한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그래도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쓰고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내가 하는 이 말들이 허황된 공허로 들릴 여지가 너무나도 많다는 걸 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이제까지의 세계관은 이랬다. 세계가 있고, 국가가 있고, 조직이 있고, 그리고 개인이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 그런데 AI는 이 구조를 근본부터 바꾸고 있다. 언어의 장벽, 법률의 장벽, 지식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세계가 개인과 바로 연결되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두렵다.

평범한 소시민들은 "반드시 본인만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휩싸여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일 리 없다.

그렇다면 개인은 언제 행복한가. 사람을 돕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고, 적절한 보상이 따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 일이 있다면 — 인류의 숙원 과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까?


그럼 어떻게 불안을 멈출 수 있는가

먼저, AI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AI의 발전 속도를 추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기술적 변화는 이미 스스로가 스스로를 개선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물리적 법칙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 스스로를 던지고, 1년이고 2년이고 고민하고, 고치 안에서 책을 읽으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것이 AI와 어떻게 연결될까? 앞서 말했듯이 AI에게 목적과 방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AI를 도구로 제대로 쓸 수 있다. 내면의 탐색이 곧 AI 시대의 생존 전략이 되는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거창한 답이 아니라, 솔직한 고민의 과정을 여기에 적는다.

나는 불안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사람은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불안은 언제나 올 수 있는 위험을 감지하는 지표다. 단점이 아니다.

왜 나는 존재하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내 불안을 통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조직에 경각심을 주고, 다른 시선을 통해 방어막을 만드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조직을 방어하고, 외부의 침입에 끄떡없게 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걱정과 해결책을 내는 것이다. 걱정을 통해 나는 내 삶의 불안을 장기와 단기로 나누어 보고, 각각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한다. 때론 막연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제까지 나의 삶이 이렇게 외톨이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동기가 없었기에 — 지금의 고민들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삶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는가. 삶은 주어진 것이지만 소중하다. 지금 느끼는 이 순간이 삶이고, 그 순간이 행복하길 원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미래를 섣불리 추측하고, 다시 안정을 찾으려 발버둥친다.

판단이란 무엇인가. 문제의 현황을 보고, 미래에 원하는 바와의 차이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도록 내리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가치와 내 개인의 가치를 비교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지금 내 뇌에서 출력되는 값들이다. 그것들이 연결되어 의미 있고 일관된 하나의 개념이 된다. 반드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나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을 생각이라 부르겠다.

결국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나는 불안해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존재는 위험을 감지한다.


내면에서 세상으로

이렇게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니즈를 확인하고, 내가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의 윤곽을 잡아나간다. 이것이 사회에 필요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내면을 보았으면 이제 바깥을 보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 경제 문제, 정치 문제, 군사 문제, 세계적 문제, 자원 문제, 환경 문제. 이것은 예시일 뿐이다.

내가 관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안 속에서 광야로 걸어 나가는 것 자체가 — 이미 시작이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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