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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Oct 10. 2022

박자 강박에 대하여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동료들의 힘이 필요하다

며칠 전 우리 팀 드러머와 가볍게 맥주를 한 잔 했습니다. 요 몇 달 동안 합주, 멤버 충원, 작업 등으로 정신 없이 보냈는데요. 최근에 겨우 여유를 가지고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고민해왔던 것들을 털어놨습니다. 아니, 사실 고민은 제가 더 많이 털어놨습니다ㅋ 이를테면 녹음을 하는 노하우나 앞으로 홍보를 어떻게 할지 등 밴드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제가 특히 궁금했던 것은 녹음이었습니다. 통상 앨범 발매를 위해 녹음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녹음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악기의 톤을 어떻게 정할지 등 신경 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죠. 저의 경우 '박자'에 대한 이슈로 한 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오디오 파일을 열어 보면 이런 식으로 된 것을 보셨을 텐데요. 녹음을 할 때도 이런 식의 파형이 기록됩니다. 문제는 파형의 꼭지점이 그리드(grid)에 꼭 맞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분의 1만 박자가 맞지 않아도 촘촘하디 촘촘한 그리드에 꼭지점을 맞긴 어렵습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기계적인 정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물론 박자가 틀린 것처럼 들리진 않습니다. 왜냐면 수십분의 1초 수준으로 박자가 빠르거나 느린 것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귀가 예민하지 않고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탓입니다. 그래도 작품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파형의 꼭지점이 그리드에 안 맞으면 매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어...? 내가 녹음한 소리의 파형이 칸 안에 완전히 안 맞네'

'박자가 너무 나간 거 아닐까?'


워낙 미세하게 박자를 틀린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녹음을 하는 저만 느끼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사소한 오류도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강박적으로 같은 마디를 100번 200번 녹음했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드러머 친구에게 "너는 녹음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어차피 사람인 이상 수십, 수백분의 1초까지 박자를 맞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또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맞을 수가 없지^_^"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소 허무한 대답을 듣고, 김이 빠질 즈음 그는 다음 말을 이어갔습니다.


"난 한 번에 10번 이상 녹음 안 해"

"10번이 넘어가면 그 음악에 대한 느낌은 사라져 버리거든"

"그 상태에선 아무리 녹음을 해도 아무 느낌도 안나와"

"그리고 설령 박자가 잘 맞아도 한편으로는 '사람'이 친 것 같지 않잖아"

"그래서 10번 안에 최대한 잘 녹음하기 위해 연습을 열심히 하는 편이야"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물론 박자가 완전히 틀리면 곤란하겠습니다만 수십분의 1, 수백분의 1 정도로 박자가 틀어지는 것은 오히려 사람이 연주했다는 느낌을 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면이 있었습니다.


한 번에 10번 이상 녹음하지 않는다는 말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저의 경우 박자를 강박적으로 맞추기 위해 100번 200번 녹음하다 보면 어느새 음악에 대한 몰입은 사라지고 과녁에 화살을 맞추기 위해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는데요. 생각해보면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음악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질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녹음에 대한 관점이 조금은 바뀐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수학적으로 완벽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많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이제는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감정이나 느낌을 더 잘 표현하는 데에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사실 드러머 외 다른 파트 동료들로부터도 많은 걸 배웁니다. 그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한 마디에선 그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고민의 두께'를 느낍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좀 더 성숙한 뮤지션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말들이 많습니다.


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자주 통감하는 요즘이지만 훌륭한 동료들이 곁에 있는 만큼 용기를 잃을 필요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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