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밤, 저런 밤, 모든 밤
고등학교 3학년, 공부량과 상관없이 모두가 입시 부담으로 마음 한쪽에 어둠을 지니고 있는 시기다. 수능 날이 다가올수록 밤이 되면 내가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갔구나. 기어코 밤이 또 와버렸구나. 오늘은 끝이구나.
커지는 상념을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밤 산책을 시작했다. 내 기분만큼이나 어두운 밤하늘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풀렸다. 밤이 블랙홀처럼 내 어두운 부분만 쏙 흡수해 녹여버렸다. 밤 산책에서 얻은 치유 덕분에 나는 밤이 두렵지 않다.
<화가가 사랑한 밤>은 거장 16인의 삶과 함께 101점의 작품을 담고 있다. 밀레의 소박한 농민의 밤. 뭉크의 고독과 상처를 치유하는 밤. 베로의 낮보다 아름다운 파리의 밤. 샤갈의 사랑이 꽃피는 짙고도 푸른 밤. 거장의 밤은 우리의 밤과 다를까.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 그것도 엄청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의 밤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 <9월 16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사람의 아들>로만 르네 마그리트를 인식했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특이한 조합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 르게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상식에 벗어난 그림을 그리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통통 튀는 창의력 영향일까. 르네 마그리트의 밤은 내게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도 달이 밝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을 향해>라는 그림 속 남자는 숲과 구별이 잘 안될 정도의 어둠에 둘러싸여 있으나 시선을 높일수록 환하게 빛나는 달에 하늘이 점점 밝게 표현된다. 어둡고 울창한 숲 위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그림 제목처럼 밝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9월 16일>은 더 밝았다. 새벽이 찾아오기 직전의 밤 같다. 파란 밤하늘만큼이나 키가 큰 나무가 정중앙에 있다. 나무의 정중앙에는 초승달이 떠 있다. 나뭇가지 틈 사이에 달이 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 말 그대로 나무 위에 달이 있다. 나무보다 낮게 떠 있는 달이라니. 남들과 다른 비현실적인 밤에 이따금 다시 이 그림을 다시 들쳐 보았다.
밤을 다룬 그림 하면 열 명 중 절반 이상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릴 것으로 생각한다. 고흐의 삶이 고독했다는 사실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그가 미술을 시작한 계기가 밀러의 그림이며 그때 나이가 27세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나와 같은 나이에 고흐는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었으며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영혼을 바친 듯한 여러 명작을 탄생시켰다. 요즘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던 내게 고흐의 늦은 시작은 삶의 여유를 남겼다.
책의 저자 정우철 도슨트 계의 아이돌로 유키즈 온 더 블럭, 톡파원 25시 등 유명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다. 작품 분석에 집중하는 기존의 미술 해설에서 벗어나, 화가의 삶과 예술을 연결하는 해설로 프로 스토리텔러가 만들었기 때문일까. 이 책은 여느 명화를 다룬 다른 책들보다 그림에 집중한 느낌이었다. 화가의 삶은 2~3페이지의 짧은 스토리텔링으로 풀고 나머지는 다양한 밤 그림들을 보여준다. 화가의 밤이 궁금해 이 책을 고른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되겠다.
독서를 시작하기 전, 화가들의 밤은 나와 다를까 궁금했던 내 호기심은 해결됐다. 화가들 또한 사람이기에 나와 같은 밤을 보냈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어떤 날은 낭만적이고 또 어떤 날은 차분하고. 저마다의 고민과 생각으로 밤은 다양한 변주를 맞이했다. 본인이 경험한 밤, 타인이 경험한 밤을 자신만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화가의 재능이 부러워졌다.
수많은 밤의 표현을 보며 이 밤과 비슷했던 날은 언제였을까 지난날을 회상할 수 있었다. 밤과 더 친해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