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출근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온 50대 여성, 일본의 한 재가요양시설에서 근무하던 간병인. 10년 가까이 일하던 곳이었다. 큰 문제가 없던 현장이었고, 이용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던 시기, 갑자기 출근이 끊겼다.
명확한 해고 통보는 없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LINE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출근하라는 연락도, 그만두라는 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퇴직’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건, 그 퇴직이 아니라 ‘말도 없이 사라진 자신에 대한 침묵’이었다.
나는 그녀를 복지 상담소에서 만났다. 당장 생계가 막막했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에는 나이와 체력, 언어가 걸림돌이었다.
“무엇이 가장 힘드셨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냥… 내가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어요.”
일본의 돌봄 현장은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문화적 차이, 이용자 가족들의 시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고용주들은 불편함을 명확히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한 해고’라는 방식으로 반응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제도상 ‘자발적 퇴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면 해고 통보가 없고, 근무 거절을 명시한 문서가 없다면, 실업급여수급도 어려워지고, 실직 상태조차 증명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그녀의 상담을 기록하며, 그 상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해고되지 않았지만, 퇴직하지도 않았다. 단지 ‘버려졌다.’ 복지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제도 밖의 상실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끊어버렸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때론 해고보다 잔인한 것은, 설명 없는 단절이다. 사회는 ‘합법’을 말하지만, 사람은 ‘인정’을 원한다. 퇴직은 행정의 절차지만, 버려짐은 인간의 감정이다.
나는 노동부 연계 창구에 확인을 요청했고, 그녀의 근무기록과 출퇴근 내역, LINE 메시지를 정리해 ‘실질적 해고’에 해당하는 사례로 재분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복지와 고용 행정은 늘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 사람은 매번 증명해야만 한다.
복지사는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된다. 하지만 감정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중립성이란, 양쪽 말을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균형 있게 해석하려는 태도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제도 언어로 번역하고, 행정적으로 의미를 부여해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녀는 결국, 일정 기간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복지센터를 통해 재취업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야기는 나쁘지 않게 끝났지만, 그 과정은 짧지 않았고, 정서적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은 다시 시작해보려구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두번 다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해요.”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복지란 그런 말을 귀담아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퇴직, 실직, 해고를 제도적 분류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말도 없이 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당신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침묵 속에서 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붙잡아, “당신은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복지의 자리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