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Apr 10. 2023

죽음

목적과 두려움

죽음, 생물학적 죽음은 누구나 한 번이다. 단 한 번 태어나서 단 한 번 죽는다. 죽음이 오면 삶이 끝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지탱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려 무기력해질 것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린 삶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의 축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장치가 죽음이다.




나는 오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적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목적이 바뀌면 가능하다. 존재의 목적이 바뀐다면 기존의 존재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칼의 존재의 목적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식칼이 누군가를 죽이는 도구가 된다면 그 칼의 존재의 목적이 바뀜으로 원래의 존재의 의미는 죽고 새로운 목적의 도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마다 봐왔던 스크루지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평생을 돈, 돈, 돈만 생각하고 가족, 이웃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구두쇠처럼 살았던 스크루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꾼 악몽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자신이 잘못 살았음을 뼈저리게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목적이 바뀌게 된다. 돈이 아니라 사람, 사랑이 목적이 된다. 그로 인해 그의 옛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나 새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의 목적이 바뀐다면 우린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앙리 까르띠에 블레송의 사진처럼 '결정적 순간'이 있어야 한다. 불치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변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가족, 건강,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하게 된 것이 기적인가? 아니면 계속 건강한 게 기적인가? 병에 걸리지 않고 지금 건강한 것이 어쩌면 더 엄청난 기적이다. 그러므로 굳이 병이 낫는 기적이 없더라도 우린 이미 기적적인 삶을 살고 있다. 기적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랭클 박사는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고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40p


우리 인생의 목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 박사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뀌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목적을 막아선다. 목적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두려움을 이기며 목적은 더욱 강해지고 목적이 약해질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목적과 두려움은 삶과 죽음처럼 닮아있고 서로를 지탱하며 동전의 양면 같은 역할을 한다.


프랭클 박사는 말한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45p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그의 고백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두려움일 수 있다. 돈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이 우리의 목적이 된다. 외로움과 버려짐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관계에 목숨을 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목적을 이루려고 우린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인가? 비난하는 손가락질인가? 무시당할까 봐 무식하고 없어 보일까 봐 안절부절못하는가?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지혜말이다.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기도제목이 있다. 잘 살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스텝이 꼬이지 않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이 빛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거나 재 뿌리지 않기를. 더 근본적인 기도를 해야겠다. 내가 정말 두려워할 존재를 두려워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백이 되면 좋겠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과 두려움이 잘못되었다면 언제든지 바른 목적과 두려움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우린 지금 이 순간에도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ps. 자살은 그 모든 가능성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제발 그렇게 죽지 말자.

모든 스토리는 후반부가 하이라이트이다. 그리고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다. 자살이 아니더라도

우린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어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