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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Apr 23. 2023

지퍼가 열린 여자

woops!

고등학교 하교 시간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중학교, 남고, 여고, 외고 4개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하교 시간이 되면 말 그대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친구들과 떡꼬치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여학생이 당당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얀색 남방을 입고 가방끈을 손으로 움켜쥐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뿔싸! 그런데 그 여학생 지퍼가 열려있었다. 그리고 하얀색 남방의 좌우 끝자락이 지퍼 앞으로 나와 리본모양을 하고 있었다. 햇빛이 찬란한 날이었다.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광채가 나는 듯한 새하얀 남방, 그리고 청바지 앞에 하얀 리본, 밝고 흐뭇하게 웃는 그 여학생이 잊히지 않는다. 차마 지퍼가 열렸다고 말은 못 했지만 해줄 걸 후회된다. 바라기는 자신의 지퍼상태를 빨리 알아차리고 수습을 했기를 바란다.


얼마 전이었다. 당근 마켓에 올린 오토바이 헬멧을 산다는 사람이 있어서 암사동으로 갔다. 헬멧 2개였는데 옮기는 사이에 흠집이 나서 갑자기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구매자가 이해해 줘서 판매를 하고 현금을 챙겼다. 버스 환승 가능 시간이 30분이라 여유 있게 다른 버스를 타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멀리서 두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언뜻 봐도 20대 초중반 정도밖에 안 되는 사회 초년생 같았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 왼쪽 여자의 지퍼가 열려있었다. 열린 지퍼 사이로 컬러풀한 무언가가 보였다. 퇴근시간이었는데 암사역은 사람이 많았다. 역시 당사자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던 날씬한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마치 첩보영화에서 정보원들이 접선하는 것처럼 조용히 다가가서 말했다.

"저기요."

살짝 놀란 여자가 멈춰 서서 경계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말했다.

"아. 네."

나는 아가씨쪽으로 더 다가가서 몸을 숙여 속사이듯이 말했다.

"저기...."

아가씨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머리를 내 쪽으로 가까이 댔다.

"옆에 분 지퍼가 열린 것 같아요."

그 말을 하고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슝 도망치듯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바로 친구에게 말하고 지퍼가 열린 여자는 깜짝 놀라서 지퍼를 닫았을 것이다.

몇십 초가 지났을까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그 아가씨는 얼마나 창피했을까. 여자들은 치마를 많이 입으니까 지퍼를 올리는 것을 까먹을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전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날씬한 아가씨가 내 앞을 지나갔다. 재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파스텔톤의 니트를 입고 있었다. 아가씨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밑으로 갈수록 통이 커지는 나팔바지 같았다. 그런데 한쪽 바지 끝단이 양말 속으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나도 종종 하는 실수였다. 뒷모습이라 본인은 발견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날씬한 아가씨에게 다가가 말했다.

"양말이 바지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길을 갔다.

여자는 깜짝 놀라서 알아듣고는 바지를 양말에서 뺏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말을 잘못했다. 바지가 양말에 들어갔다고 해야 하는데 반대로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의 창피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해 줘서 잘한 것 같다.

예전 여자친구는 특이하게도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지퍼 고리를 밑으로 내려서 고정시켜야 하는데 그걸 몰랐다. 그래서 지퍼 윗부분이 살짝 열려있어서 Y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냐 묻고 방법을 알려준 후에는 지퍼를 잘 올렸다.


나는 그런 걸 많이 본다. 지퍼의 상태, 가방이 열린 사람들, 엉덩이에 뭐가 묻은 사람들, 그러면 대부분 말을 해준다. 반면 내가 가방을 열고 다닐 때는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섭섭할 때도 있다. 다음번에 맘에 드는 여자가 그런 상황이 되면 젠틀하게 귀에 속삭여준 후 커피 한잔 하자고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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