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 아닙니다!
22살 군대에서 무릎을 다쳐서 강원도에 있는 군대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세상에 벌써 20년도 넘게 지난 일이다. 그때 국군병원 시설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 병원을 들어가는데 무슨 땅굴처럼 생긴 통로를 끝없이 따라가야 했다. 롯데월드에서 아마존을 탐험하는 신밧드의 모험을 연상케 했다. 어찌나 무섭고 마음이 불안했는지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던 기억이 난다. 입원실은 커다란 강당에 환자용 베드가 100개 정도 깔려있었고 나에게 지정된 베드에서 생활을 했다. 병원에 도착한 첫날밤 자기소개를 했던 게 기억난다. 병실을 가득 채운 군인들이 환자복을 입고 자기 베드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물론 병장들은 누워있었을 것이다. 나는 자신감있게 쫄지 않고 베드 위에 벌떡 일어나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쳤다.
"충~성! 상~병! 김! 태! 우!! 전방 GOP 철책에서! 근무하다! 와씁뉘~~ 돳!"
내가 온 몸에 에너지를 끌어올려 관등성명을 외치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오~우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국군병원 분위기는 당나라 부대처럼 군기가 제로에 가깝다. 보이스카웃 같은 느낌이랄까. 나이롱 군인들로 가득했던 병실에 내가 군기를 왕창 넣어서 샤우팅을 하듯 소리를 지르니 다른 군인들이 놀란 것 같았다. 후방에 있는 병원이라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뭔가 쎄게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병원 생활은 정말이지 한가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매점가고 산책하고 점심먹고 산책하고 자고 저녁먹고 놀고 간식먹고 잔다. 병원에는 수술적 치료가 필요한 다친 군인들이 있는데 수술날짜가 잡힐 때까지 그렇게 편하게 대기했다.
감사하게도 병원 안에는 교회도 있어서 낮에는 크리스천 군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라면 끓여 먹으면서 놀고 저녁에는 예배도 드렸다. 병원에서 만났던 크리스천 군인들이 신앙에 열심 있는 친구들이어서 함께 새벽예배도 드렸다.
그때 기억나는 군인이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일병이었던 것 같다. 대화를 하다가 여자친구 얘기를 하는데 세상에! 그 친구의 여자친구가 자기 보다 20살 연상이라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봤다. 친구들과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는데 그녀는 카페 사장이었고 어느 날 밤새 술을 먹다가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차이가 20살인지 24살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20살은 넘었다. 그 친구는 키나 덩치가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와일드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어땠냐면 나이는 어리지만 인생의 쓴맛, 단맛을 여러 번 맛본 것처럼 철없는 20대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어느 토요일에 그 친구의 20살 연상 여자친구가 병원으로 면회를 왔다. 기억에 그 친구 엄마도 같이 왔었던 거 같은데 100% 확실하지 않아서 그 친구 엄마는 생략한다. 마침 우리 가족들도 면회를 왔다. 돗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가까운 곳에 그 친구 커플도 있었다. 나는 그때 부끄러움이 많았는지 그 여자친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날씬하고 30대 중반정도의 분위기가 났던 것 같다.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눈치 깠지?"
그녀의 말이었다. 무엇을 눈치 깠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중년의 여성은 잘 쓰지 않는 장난스럽고 개구쟁이 같은 말투는 기억난다. 나이는 많지만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해 본다. 아주 흐릿한 사진처럼 병원 한쪽 잔디밭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두 사람이 기억난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20년이 넘게 지났으니 그 친구는 40대, 여자친구는 60대다. 중년 남자와 할머니다. 둘은 결혼했을까? 아이를 낳았을까? 궁금하다.
나이가 아주 어린 여자와 결혼한 남자 연예인 이야기는 종종 듣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이차가 심한 연상여자 커플은 그 친구가 유일하다. 둘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길이 없으니 상상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둘의 사랑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도 없다. 왜냐면 연상연하 커플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다. 에마뉘엘 마크롱이 77년 생이고 그의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은 53년 생이니까 24살 차이의 어마어마한 연상연하 커플이다. 엄마와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나이차다. 나도 4살 많은 미술학원 선생님을 좋아해 본 적은 있지만 20살 이상 차이나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그게 가능해? 어떻게 가능하지? 도대체 왜?' 내 마음의 생각이다.
마크롱과 그의 부인은 고등학교 선생님과 학생 사이였고 마크롱이 먼저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 유부녀였는데 심지어 첫째 딸이 마크롱과 같은 반이었다. 그녀는 어린 마크롱의 사랑을 받아들여 10여 년 열애를 하고 결국 남편과 이혼을 했다. 이혼한 다음 해 54살의 나이에 30세의 마크롱과 재혼을 했다. 프랑스는 우리와 문화와 법이 달라서 가능했겠지만 우리나라 같으면 미성년자 보호법에 의해 처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녀사냥을 당해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20살쯤에 여자친구를 만났을 테고 마크롱도 20살이 되기 전에 브리지트를 만났을 테고 나도 20살쯤에 미술학원 선생님을 만났다. 남자의 20살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마치 끝없이 날아가는 로켓처럼 에너지가 폭발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20살의 에너지가 일생에서 제일 컸다면 사랑의 크기도 제일 크지 않았을까?
그 사랑이 너무 강력하고 뜨겁고 순수해서 세상이 말하는 장애물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랑의 열매는 가슴속 깊이 가장 안전하고 중요한 어딘가에 보관된다. 그리고 마치 포도주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고귀해지고 가치가 높아진다. 그때의 그 순간의 기억과 함께. 그래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은 걱정만큼 주름은 많아지고 우리의 배우자, 가족, 친구들도 다들 회색빛으로 늙어가는데 첫사랑의 그녀는 기억 속 예전 모습 그대로 빛나게 남아있다. 흐려지는 세상과 대비되듯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난 모습으로. 아기처럼 부드러운 피부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 볼을 건드리면 촉촉한 물방울이 통통 튈 것처럼 새초롬하고 귀여운 표정, 목소리에서 사과향기가 나서 같이 앉아 이야기만 해도 마냥 좋았던 예쁜 20살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말이다. 그런 첫사랑이 70살이 되어 할머니가 되었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마크롱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조카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있다. 그 녀석이 며칠 전에 여자친구 얘기를 하면서 나의 엄마 그러니까 녀석의 할머니를 보며 자기 여자친구는 할머니라고 말했다. 할머니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아주 똑똑하고 대단한 녀석이다. 어디서 그런 화법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국군병원이라고 쓰여있는 환자복을 입고 웃고 있는 그 친구가 왜 생각 나는지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없어서 아는 사람들의 별별 연애 이야기까지 생각나는가 보다. 올해는 나도 품절남이 돼야 할 텐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