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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Jun 16. 2023

신난다! 현수막 자르는 공무원! 6

장군의 운전병

장군의 운전병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운전면허를 15번 떨어졌다. 기능시험을 8번, 도로주행을 7번 떨어졌는데 그마저도 16번째 시험에서는 도로주행 점수를 체크하는 여자경찰관님이 자기가 하라는 데로 하라고 해서 겨우 붙었다. 

예전에는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1차 기능시험과 2차 도로주행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우표처럼 생긴 시험응시표를 사서 응시원서에 붙여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15번을 떨어졌기 때문에 응시원서가 정말이지 넝마가 되었었다. 심지어 너덜너덜해진 원서가 찢어져서 재발급을 받았고 그 위에 다시 시험응시표를 붙였다.  


아무리 운전을 못하는 아주머니라도 3번이면 붙는다는 운전면허 시험을 나는 15번을 떨어지고 장장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내 나이 21살이었다. 서울의 강남면허시험장으로 가서 실기시험 접수를 하고 근처에 줄줄 붙어 있었던 운전학원 중에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갔다. 


"운전면허 실기 시험 보려고요."


"잘 오셨습니다. 딸 때까지 연습할 수 있는 건 40만 원, 10번 정도 타보는 건 20만 원인데 젊은 사람들은 몇 번만 타봐도 금방 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젊은 남자는 운전면허 따위는 껌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에 나란 남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하기 짝이 없는 착각 중에 착각이었다. 나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0.0000001% 운전을 미친 듯이 못하는 남자였다. 나의 운전실력을 전-혀 몰랐던 나는 젊은 남자로서 당연히 20만 원짜리 10회 쿠폰으로 학원등록을 하고 운전을 배웠다. 강남의 한적한 골목길에 연습차량을 세워두고 엑셀과 클러치, 기어변속을 알려주었다. 나에게 주어진 10번의 운전연습을 모두 마치고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때 나는 강원도 춘천에 있는 지방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강원도에 있는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시험을 봤다.

서울에서 세는 바가지가 강원도에 간다고 안 세겠는가? 난 역시 시원하게 떨어졌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코스시험을 8번을 떨어지고 나서 9번째에 겨우 겨우 정말이지 간신히 붙었다. 그 당시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를 앞으로 몰 줄만 알았지 주차처럼 공간과 각도를 계산하고 생각하는 걸 너무 못했다. 


코스를 어렵싸리 붙고 나서 도로주행에 도전했다. 코스를 따면 실제 도로에서 주행연습을 할 수 있는 임시 면허증 같은 게 나왔는데 그걸 가지고 아버지의 봉고차 베스타를 가끔 몰았다. 도로주행은 자동차게임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얼추 운전을 했다. 그래서 부모님들도 도로주행은 한번 아니면 두 번이면 붙을 줄 알았다.  

하지만 코스를 8년 떨어진 내가 갑자기 운전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지 않은 게 당연했다. 나는 계속해서 줄구장차 도로주행시험에서 떨어졌다. 


총 10번 정도 떨어지고 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각오를 했다. 그래! 안전! 운전을 잘 못해도 안전하게 한다면 경찰관님에게 어필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서 자동차를 최고로 부드럽게 모는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시속 10~30km로 트럭을 운전했다. 서울 한복판, 그것도 강남에서 시속 10km로 가는 건 정말이지 나무늘보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가는 것이다. 너-무 너-무 천천히 운전을 한 그날도 결국 떨어졌다. 경찰관은 거북이처럼 쫄쫄쫄 가는 1종 보통 차량 응시표에 불합격 도장을 찍었다.


12번째인가? 지난번에 너무 천천히 갔던 것을 만회하고자 이번에는 와일드한 콘셉트로 시험을 보기로 했다. 부릉하고 운전면허시험장 입구를  힘차게 나가려고 우회전을 하는 순간! 우회전 코너를 너무 짧게 돌아 트럭이 입구 우측 기둥 부딪힐 뻔 한 상황이 발생했다. 천만다행으로 부딪히지는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으로 가는 것 밖에 몰랐던 나는 허둥지둥 댔고 시험장을 나가보지도 못하고 경찰관은 나를 내리라고 했고 불합격 도장을 찍었다. 엉망진창이 된 응시표처럼 나의 운전실력도 엉망진창이었다.


엄마에게 또 떨어졌다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15번째 시험날! 그날은 엄마가 운전면허시험장에 함께 왔다. 그날도 역시 난 떨어졌고 엄마는 도로주행시험을 감독한 여자경찰을 찾아가서 황당해하며 물었다.


"아니 우리 애가 집에서도 운전을 제법 하는데, 왜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여자 경찰은 나에게 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김태우 님은 아직 클러치에 대한 개념도 모릅니다."

그랬다. 나는 클러치에 개념을 잘 몰랐다. 1년 동안 운전면허시험을 준비하면서 클러치를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니 줄줄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엄마는 더 이상 여자 경찰과 대화를 하지 않았고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1주일 정도 뒤 드디어! 16번째 시험을 보러 갔다! 그런데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15번째에 날 떨어뜨린 경찰관이 내 시험 감독관이었다! 시험 감독관은 랜덤이기 때문에 15번을 보는 동안 한 번도 같은 감독관을 만난 적이 없었는 말이다! 그녀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나를 보고 말했다.


"태우 씨, 긴장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데로 해요!"


나는 복잡한 강남 도로에서 진짜 경찰관님이 하라는 데로 했다. 나의 아킬레스건인 클러치 연습도 어느 정도하고 가서 다행이었다. 신호, 언덕, 속도조절, 위급상황 등 그녀는 완벽한 코칭으로 나의 드라이빙을 이끌어줬다. 운전면허시험장에 도착했고 드디어! 나는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장장 1년의 시간과 도로연수비, 접수비, 교통비를 합쳐서 200만 원가량의 돈이 들었다. 그토록 어렵게 운전면허를  땄지만 여전히 운전을 잘 못했다. 당시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분들이 있었다. 바로 택시드라이버였다. 나는 택시를 탈 때마다 택시기사님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운전면허를 어렵게 땄고 나는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너무나도 아쉬운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논산훈련소 입소 첫날! 짧은 머리를 한 수많은 청년들이 운동장에 줄을 서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때 어떤 여자 장교가 우리 앞으로 나타났다. 교실처럼 1~4 분단처럼 나눠져 앉아 있었는데 나는 3 분단 앞에 있었고 여자 장교는 2 분단 쪽 앞에 서서 말을 했다.


"여기 4년제 다니고! 운전면허 있고! 광진구에 사는 사람 있나?"


나는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는 지방대지만 4년제를 다니고 운전은 못하지만 운전면허가 있고 더군다나 광진구에 살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할 사람을 뽑아가려는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특별 착출인 것이다!


"없어? 장군님 운전병을 찾고 있다!"


'장군 운전병? 그거 정말 좋은 거 아니야?? 광진구에 사는 걸 물어보는 거 보면 아마 집에서 출퇴근하는 건가 봐! 완전 대박!'


나는 심장이 쾅쾅 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0.0000001% 장군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찬란한 별똥별처럼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어서 빨리 내가 앉아있는 3 분단 쪽으로 와서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여긴 없는가 보군!"

그런데 여장교는 3 분단 앞으로 오지 않았고 아쉬운 표정과 함께 돌아서서 갔다. 


"아름다운 장교님!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찾고 사람이 바로 접니다! 하하하!"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당시 나는 숫기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그녀를 보내버렸다. 나는 나의 군생활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기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 아....'


결국 그녀는 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She has gone forever in my sight but she lives in my mind forever!


그렇게 나의 군생활은 시작되었고 논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과 특별 교육훈련을 받고 논산훈련소 출신이 가기 힘든 강원도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고 대기 후 최전방 강원도 인제까지 갔다. 그것도 모자라서 38선 비무장 지대까지 가서 대남방송을 들으며 철책을 지키다가 무릎을 다치고 의병전역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번쩍 손을 들고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라고 용기 내서 호기롭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장군차는 분명 수동기어가 아니라 자동기어일 테고 장군을 출퇴근시켜 주면 나는 집에서 편하게 군생활을 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대기업 총수의 운전기사를 하며 군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후회 중에 베스트 5에 들어가는 엄청난 후회 스토리다. 지금 생각해도 고구마 5개 입에 쑤셔 넣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갑갑하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가장 가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때의 아쉬움을 담아 위로하는 마음으로 상황극이나 한번 하고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뒷좌석에 애인을 태운 듯 부드럽게 드라이빙을 하고 있다. 운전병들은 차량 운행 중에 코스에 대해 설명을 한다고 알고 있다. 


김일병 : "장군님! 우회전하겠습니다!"

끼익! 쾅!

김일병 : "헉! 장군님!!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4 스타 장군 : "으.... 너 이 XX! 죽고 싶어!!! 박대령! 이 새끼 영창에 보내버려! 아이구 머리야!"


거인 같은 헌병들이 어느새 나타나 김일병을 끌고 영창에 처넣고 김일병은 철장에 갇혀 벽만 보면서 2달을 폐인처럼 보내다 산골짜기 부대로 쫓겨난다. 어렵게 전역을 하고 장군을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처절하게 준비한다. 드디어 복수의 그날이 다가온다! coming soon! 


생각해 보면 장군 운전병이 안된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 나는 15번 운전면허를 떨어졌던 사람이니까.

장군도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나도 마찬가지고! OK! SAME! S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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