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Jun 20. 2023

신난다! 현수막 자르는 공무원! 9

TIME TO SAY GOOD BYE난 간다잉~니들끼리 잘해봐~

TIME TO SAY GOOD BYE

난 간다잉~니들끼리 잘해봐~ 


 결국 나는 부서 이동을 요청하고 다른 부서로 갔다. 그런데 하필 간 데가 같은 10층에 있던 다른 과였다. 하- 그들을 계속 봐야 한다니. 이동한 부서는 치수과였다. 치수과- 부서명이 낯설었다. M, L, XL 같은 옷 치수가 생각났다. 영어로는 워터 컨트롤, 한자로 물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다. 편한 자리라는 말을 들었다. 부서에 가니 7급 주임님이 최고 선임으로 팀장역할을 했다. 팀장이 정년퇴직을 해서 공석이고 6급이 팀에 없어서였다.



 키가 크고 무표정하고 안경을 낀 전형적인 차가운 느낌의 공무원이었다. 나에게 두 가지 조건을 이야기했다. 


"빗물펌프장을 갈래요? 구청에서 일할래요?"


 빗물펌프장에 가면 두 명이서만 근무하고 무지하게 편하다는 말을 들었다. 구청에서 계속 근무를 하게 된다면 10층에서 내가 싫어하는 직원들을 마주쳐야 하고 공무원 수백 명이 근무하는 구청이 답답함이 싫었다. 그렇다고 바로 편하다고 소문난 펌프장으로 간다는 말을 못 했다. 무엇보다 펌프장에 갔을 때 비가 오면 무조건 대기해야 한다는 말이 걸렸다. 주일에는 최대한 어떻게 해서든지 예배에 참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일에 출근하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그래도 구청에 있는 건 너무 싫어서 펌프장에 가겠다고 했다.

 

 처음 인사발령을 받을 때도 펌프장으로 가게 될 거라고 들었는데 선임 주임은 펌프장의 단점을 계속 이야기했다. 내가 구청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이 많은 다른 7급 선배가 편하고 좋은 펌프장 자리가 비어서 자기가 가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결국 밀린 것이었다. 나를 구청에 두기를 원하는 선임의 의중에 따라 구청에 남기로 했다. 하. 그게 나의 실수였다. 구청을 벗어났어야 했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구청이 뭐가 좋다고-


 하- 나는 다시 새로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펌프장 직원들이 구청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확실히 구청 냄새가 안 났다. 공무원 같지가 않다는 뜻이다. 동네 건달이나 시골 청년들 같았다. 내가 가기로 했던 펌프장에서 상주하는 선배는 온몸에 문신도 있었다. 정말 무서웠다. 인정사정없을 것 같은 사이코처럼 보였다.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펌프장에 안 가고 구청에 남아있게 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일이 터졌다. 나 대신 펌프장 자릴 꿰찬 선배와 문신 선배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구청에서 일을 열심히 하기로 소문이 조금 나있었다. 문신 선배가 나에게 와서 헤죽 웃으며 말했다.


"너 일 열심히 한다며 너 데려갈 거다." 


진심으로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를 펌프장에 가둬놓고 다방 아가씨나 창녀를 불러서 나와 성관계를 시킬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귀곡산장이나 드라큘라 집, 흉가, 사창가에 갇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온몸에 문신이 나있고 눈빛이 범상치 않은 선배와 함께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정말 가기 싫었다. 계속 기도했다. 안 가게 해 주시길. 기도를 들어주시면 단기선교를 가겠다고 서원도 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과장의 오른팔 넘버 2 주무팀장이 나를 불렀다. 펌프장 가고 싶냐는 거였다. 문신 선배가 나를 펌프장에 데려간다고 했단다. 나는 싫다고 했다! 절대 안 간다고 했다! 나는 펌프장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내가 문신 선배를 무서워했던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펌프장이 두 군데였는데 나와 함께 발령을 받은 선배가 문신 선배와는 절대같이 근무 못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분도 동네 건달 스타일이었는데 그런 분이 무서워할 정도면 문신 선배는 정말이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이란 말인가? 진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 보였다. 언제 눈이 확 돌아서 사이코 짓을 할지 모르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정말로 언에듀케이티드, 언노멀, 언오디너리 했다.


 나는 재빨리 우리 팀 7급 선임에게 사태를 설명하고 절대 펌프장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선임은 처음에 나를 구청에 묶어두기로 결정되었을 때처럼 뭔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이 그 좋은 데를 안 가다니 굴러온 복을 자기 발로 찼네. 하하하' 뭐 그런 웃음이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두 번째 기회도 놓친 것이었다. 젠장.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가 문신을 했지만 사람은 좋은 분이었다. 



내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온갖 괴기스러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나에게 굴러온 복을 뻥-차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가기로 한 펌프장은 아주- 편한 곳이었다. 또 나의 근거 없는 두려움이 행운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구청에서 멀리 떨어져 무인도 같은 외딴섬인 펌프장에서 탱자 탱자 놀 수 있었는데 말이다.


 치수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기계와 전기를 담당하는 팀에서 나는 분수시설, 지하저류조, 전기요금, 민방위 비상 급수시설, 민방위 경보기, 저류시설 수문관리 등 다양한 시설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기계와 전기에 대해서 아예 몰랐지만 맡겨진 업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책임감을 갖고 시설들을 알아가며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답답하게 행정일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 나가 시설을 점검하러 출장을 나가니까 재미도 있고 갑갑하지도 않았다.  


 담당자별로 특정 시설을 책임져야 하는 구조라서 내가 맡은 시설에 대해서는 담당 공무원인 내가 제일 잘 알게 되어 부서 사람들에게 전문성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과장님, 팀장님, 팀원분들도 아주 좋은 분들이었다.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길 밖에 없었다. 업체 직원들만 시키는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온몸을 다해 일했다. 분수 저류 시설도 자진해서 들어가고 무조건 현장에 나가서 점검을 했다. 최대한 원칙과 규정에 맞게 업무를 처리했다. 위험한 순간들도 있었다.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는 절벽 같은 곳에 설치된 분수시설을 청소하는 일을 업체에게 시키면 되는데 담당 공무원이 나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작업을 하다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오싹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지켜주셔서 감사하다. 선배 중에 한 명은 내가 그렇게 까지 일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솔선수범해서 최선을 다해 일할 때마다 과장님이 어디선가 나를 보시고 칭찬을 해주셨다.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을 때 기분은 참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구청 출근 첫날 진상을 떨었을 때 날 위로해 줬던 인사팀장님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나를 보면서 인사팀장님이 말했다. 


"열심히 해!"


눈치가 빠른 나는 그 말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승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사팀장님의 말이 내가 승진 대상자가 될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하라는 말로 들렸다. 생각해 보면 치수과에서 있었던 1년 6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7급으로 승진을 했다. 공무원 임용 후 4년 6개월 만에 7급이 된 것은 엄청나게 빠른 승진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7급이 되니까 뭔가 된 것 같았다. 당시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아들의 승진 소식에 부모님도 무척 좋아하셨다. 



 하지만 7급이 된 나는 멍청하게도 겸손을 잃어버리고 건방져졌다. 다른 7급 선배들도 나와 같은 7급이라고 생각하며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는 성경 말씀을 잊었다. 실력은 없고 자존심만 세진 나는 팀원들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 하루 종일 말도 제대로 안 하고 선배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 잘못을 깨닫고 함께 일했던 선배에게 죄송한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교만이 관계를 얼마나 망치는지 알게 되었다. 승진도 하고 업무도 익숙해졌지만 나의 강박증상은 날로 깊어져 갔다. 바보처럼 병을 계속 키웠던 것이다. 어느 순간 강박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강박이 점점 심해져서 내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일에 대해서도 강박을 느꼈다. 예를 들어 같은 팀에 선배가 허위보고를 하면 내가 보완하는 식이다. 선배가 어떤 시설 현황을 거짓으로 꾸며 과거 사진으로 보고 서를 올리면 내가 퇴근하고 직접 가서 확인을 했다. 그런 식으로 해야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에 대해 내가 보완하지 않으면 나도 동일한 벌을 받을 것처럼 두려웠다. 누군가 저녁에 추가 근무를 올리고 안 들어오면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사무실 앉아 시간을 때웠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 들을 내가 몰래 메꿔나갔다. 정말 너무 괴로웠다. 



작가의 이전글 신난다! 현수막 자르는 공무원!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