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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Oct 02. 2023

크리에이터 공무원 스몰토크 5

피규어 덕후들의 아지트 방문기

 아버지, 나, 초3 조카 남자 3명이 함께 지하철을 타고 피규어 덕후들의 아지트, 국제전자상가를 다녀왔다. 국제전자상가는 3호선 남부터미널역 3번 출구 앞에 있는데 9층 전체가 피규어 가게들로 가득 차있다. 연휴 5일 차 역시 남부터미널역 근처 서초동 거리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9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초등학교 3학년 조카가 피규어를 좋아해서 1년에 두 번 오기로 했었는데 그 두 번이 어린이날과 추석이다. 


만화, 게임,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휘황찬란한 피규어들 천지다. 다만 아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캐릭터들도 아주 많아서 건강한 남자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한다. 대부분 20-30대로 이루어져 있고 여자들이 남자보다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피규어, 프라모델, 굳즈들을 사기 위해 미로 찾기 하듯 온 가게를 누비며 돌아다닌다. 


나는 이번에 중고로 파는 초사이어인 손오공 피규어를 8,000원에 샀다. 조카는 포켓몬 한카리아스라는 보라색 괴물 장난감을 14,400원에 샀다. 내가 드래곤볼에 나오는 캐릭터를 구경하면서 이름을 줄줄이 말하니까 조카가 신기한 듯 물어봤다.


"삼촌은 어떻게 걔네들 이름을 다 알아요?"


"너도 포켓몬, 귀멸의 칼날 캐릭터 다 알잖아? 나는 걔네들 이름 몰라."


"아. 그렇구나."


"내가 어렸을 때 다 좋아했던 애들이야."


볼링공만 한 반투명 오렌지색 볼 7개를 모으면 용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드래곤볼 스토리 핵심을 소개해줬다. 그중에 주인공은 손오공이고 베지터라는 경쟁자가 있고 나는 둘 다 좋아하는 데 솔직히 베지터가 더 좋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손오공을 샀다. 왜 그랬을까? 나는 베지터를 더 좋아하는 데 왜 손오공을 샀을까? 베지터는 원래 나쁜 놈이고 손오공을 이기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다가 결국 자기도 초사이어인이 된 질투의 화신 같은 캐릭터다. 반면 손오공은 착하고 순진하지만 언제나 최고로 강력한 캐릭터다. 성격으로 치면 손오공이 자석의 S극, 베지터는 N극이고 손오공이 플러스라면 베지터는 마이너스다. 실력으로 치면 올림픽, 아시안게임, 선수권대회에서 언제나 금메달을 따는 손오공, 그리고 만년 은메달만 따는 2인자가 베지터다. 


키가 작고 뭔가 불만에 싸인 표정, 매섭고 차가운 눈빛과 온통 승부욕으로 가득 찬 모습이 날 닮은 것 같아서 베지터를 좋아한다. 그런 베지터가 부르마와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으니 그가 바로 트랭크스다. 베지터가 인간과 연애를 해서 아빠가 됐다는 사실은 나에게 충격 그 잡채였다. 베지터는 알고 보면 따뜻한 남자 같기도 했다. 


아무튼 못됐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는 손오공을 샀다. 마이너스가 플러스에게 끌리는 것처럼 착하고 순하고 강한 캐릭터에 저절로 끌리는 것 같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스미스 요원이 결국은 하나, 오라클이었다는 충격적인 결말처럼 손오공과 베지터는 상극 같지만 서로의 전자를 공유하는 공유결합 분자처럼 분리된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데 둘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건 오버 같아서 이만 하고 싶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초3 조카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초등 고학년인데 포켓몬은 졸업해야 하지 않겠니?"


내 말을 들은 조카는 곰곰이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 산 포켓몬 장난감을 당근에 올려서 팔자고 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젠 포켓몬 같은 건 졸업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카는 조금 더 어른스러운 피규어를 사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어른스러운 피규어라는 말이 뭔가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말 같은 생각이 든다. 


조카가 아니었다면 피규어 덕후들의 아지트에 가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좋아했던 캐릭터들을 나와 연관해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를 통해 내 안의 어린이를 만나는 걸 보면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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