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와 오토바이

by 태리우스

아버지는 40년 넘게 오토바이를 타셨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빨간색 스쿠터를 사서 아버지, 엄마, 나, 여동생을 태우고 용마랜드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그전까지는 자전거를 타셨는데, 자전거를 많이 잃어버리셨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는 모자 만드는 기술자셨다. 고 전태일 열사가 고발했던 것처럼 공장에서 잠을 쫓는 약을 먹어가며 미싱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월급이 밀려 못 받아 엄마가 공장에 쫓아가 전화기를 집어 던지며 사장과 싸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젊었을 적 엄마 사진을 보면 지적이고 아름다운 숙녀라서 놀라는데 그때부터 엄마는 장군 같은 여자가 된 것 같다.


아버지는 남의 공장에서 기술자로 계속 일하시다가 스쿠터를 사실 때쯤 아주 작은 공장을 열고 독립하셨다. 투룸으로 한쪽은 공장, 한쪽은 방이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공장을 운영하시다가 어느 날 빌라 2층 전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그 빌라가 너무 좋아서 공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에 이사 간 집을 구경하러 오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스쿠터가 아닌 125cc 액티브라는 오토바이를 사셨다. 공장도 큰 곳으로 이사했다. 오토바이로 일하시기 부족하셨는지 베스타라는 봉고차도 하나 사서 공장을 운영했다. 기동성이 필요한 순간에는 오토바이를 타셨고, 원단처럼 짐이 무겁거나 옮길 물건이 많으면 봉고를 타셨지만 여전히 오토바이를 많이 타셨다.


그러다 내가 22살 때쯤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자세한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도로에 쓰러져서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셨다는 말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 오토바이를 타지 않으시고 차로만 일을 하셨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셨다. 집도 두 채나 사고 비싼 차도 사셨다. 이번에는 정말 비싼 오토바이를 사셨는데, 브랜드는 그 유명한 할리 데이비슨이었고, 그중에서도 최고급 모델을 사셨다. 여기서 잠깐, 엄마는 내가 공무원이 되길 정말 많이 바라셨다. 그래서 나를 공무원 공부시키려고 비상금을 모아두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이지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이나 절대로 공무원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엄마는 포기하고 모아두었던 내 공무원 학원비를 아버지의 오토바이 비용에 보탰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공무원이 되었을 때 엄마는 자신이 공무원이 된 것보다 더 좋아하셨고, 또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었을 때는 가슴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다시 아버지의 오토바이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그 비싼 할리 데이비슨 울트라 클래식을 타고 주말에 라이딩을 즐기셨다. 그런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주일에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함께 어울리는 동호회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싫어하거나 말린다고 해서 아버지가 내 말을 들을 분은 아니셨다. 그렇게 몇 년을 할리를 타셨다. 아버지가 라이딩을 출발하거나 귀가할 때 할리만의 천둥치는 듯한 배기음이 골목길을 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독립해서 근무하던 주민센터 근처 원룸에 살 때였다. 퇴근 후 월요일 오후, 책상에 앉아 책을 보려는데,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았다. 낯선 남자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이었다. 나는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건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아버지는 혼수상태셨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것이다. 전날 일요일, 추운 날씨에 할리 데이비슨을 타셨던 게 생각났다. 날씨도 추운데 오토바이를 타면 혈관과 혈압에 안 좋은 것은 의료 지식이 없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날은 엄마가 교회에서 미얀마로 단기선교를 떠난 날이었다. 엄마는 미얀마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뇌로 가는 혈류가 막혀 뇌손상과 뇌압이 높아져 심각하고 위태로운 상태였다. 혈관에 막힌 혈전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뇌경색 환자 전용 병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았다. 그날부터 기나긴 치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재활치료를 받으셨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엄마는 초인적인 힘으로 아버지를 돌보고 지켰다. 그 시간 동안 있었던 폭풍 같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의 마지막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도 팔았다. 이후로 우리 집에는 오토바이가 없었다.


공무원을 그만둔 나는 취업이 되지 않아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오토바이도 없고 전기 자전거도 없어서 자전거로 하고 있다. 한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원단을 나르고, 커다란 봉지에 모자를 담아서 나르며 지하 공장을 하루에도 수십 번 왔다 갔다 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셨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아버지 이마와 등에서 흘러내렸던 땀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수십 년을 그렇게 사셨다. 땡볕 더위 아래에서, 꽁꽁 언 빙판같은 겨울길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에도, 낙엽이 떨어지는 차가운 가을 아침에도, 소나기가 쏟아지는 장마 기간에도 오토바이를 타면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


아버지가 125cc 액티브 오토바이 뒤에 짐을 가득 싣고 일을 하셨던 뒷모습이 아련하게 생각난다. 아버지가 흘린 땀이 쌓이고 모여서 내가 비싼 옷을 사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집에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땀흘린 하루하루가 모여 사업으로 성공하셔서 서울에서 자수성가하신 것이었다. 나도 땀을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돈을 벌고 있다. 내가 땀흘린 날들이 모여 다시 일어설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나에게는 나의 멋진 아버지의 유전자가 있으니까. 으랏차차!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파트와 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