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Sep 30. 2024

1번 사물함

No.1 이 아닌 Only.1으로

가방이 무거운 걸 질색한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가방은 무겁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난 늘 가방이 무거웠다. 무거운 짐들을 들고 다니기 싫어서 도서관 사물함을 사용한다.


아파트에 로열층이 있는 것처럼 사물함에도 클래스가 있다. 사물함이 대체적으로 6층으로 되어 있다면 4~6층이 로열층이다. 1,2층 사물함은 사용하기가 불편하다. 물건을 넣고 꺼내려면 무릎을 꿇거나 몸을 숙여야 하는데 아주 불편하다.


나의 47번 사물함은 2층이었다. 층수만큼 중요한 게 위치와 방향이다. 도서관 출입문과 좌석배치기계와 가까이 있어야 편한데, 47번 사물함은 사물함 섹터 안쪽 구석에 있었고 급기야 화장실 앞에 있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남아있는 사물함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 달 단위로 연장을 해야 하는데 만료일 하루를 남겨놓고 연장 신청을 했다.


그런데 연장 신청 후 몇 시간 뒤에 사물함 디스플레이를 보니 1번 사물함이 빈 사물함이 되어 있었다. 이용자가 짐 싸서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도서관에는 각종 국가고시, 자격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1번 이용자가 시험에 합격해서 도서관을 탈출했길 바란다.  


텅 빈 1번 사물함을 보고 고민이 되었다. 도서관을 몇 년을 다녔는데, 한 번도 가져본 적 없고 가져볼 기대도 하지 않았던 1번 사물함이었다. 갖고 싶었다. 1번 사물함을 쓰면 1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 뭔가 성공할 것 같은 느낌, 더 이상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 되지 않고 나도 한번 어깨 피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알라딘의 지니가 사는 램프 같은 사물함이 되어 줄 나만의 1번 사물함의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한 달 이용료는 9천 원, 1인 1개 사물함 이용원칙이 있었다. 예전에 어쩌다 2개 사물함이 사용가능한 때가 있어서 은근슬쩍 트라이를 해봤지만 신청이 되지 않았다.


9천 원을 날리고 1번 사물함의 오너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열람실에 들어가서 묵묵히 내 일을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진득하고 묵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민하다가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오늘 사물함을 연장신청했는데 교체할 수 있나요?”

“담당자가 오늘 출근을 안 했습니다.”

“그럼 대직자가 있을 거 아니에요? 공공기관 업무분장에서 대직자가 없는 게 말이 됩니까!? 저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요! 팀장 나오라고 하세요!

팀장 없으면 도서관장 불러주세요! 이런 식으로 민원대응하면 광진구청장에게 민원 넣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네.”


소심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비우고 이 기회를 놓치면 내 평생 두 번 다시 1번 사물함을 가져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퍼스트 클래스 같은 1번 사물함을 갖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과감히 9천 원을 날려 보내기로 했다.


47번 이용종료를 신청하고, 1번 사물함의 보증금 만원, 월이용료 9천 원을 결재하고, 사물함 이사를 했다.


수도권 변두리 위성도시에서 부자동네 압구정동, 청담동이 있는 강남구로 이사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기분과 마음가짐으로 멋지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했지만.


말-도-안-돼-는-헛-된-생-각-이-었-다.


1번 사물함이던 47번 사물함이던, 아무런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물함은 물건을 담아두면 그만이다. 위치나 숫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1번 사물함으로 이사하고 오히려 더 게을러지고 시간관리를 못하고 있다. 47번 사물함을 쓸 때는 그래도 짐을 넣고 뺄 때 몸을 굽히면서 운동이라도 됐는데, 요즘에는 운동부족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1번 사물함을 쓰면서 두부가 폭발하는 사건도 터졌다. 1번 사물함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이다.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양지 중에 양지다. 그런 곳에 두부를 뒀는데 터져버린 것이다. 두부 썩은 냄새를 지우기 위해 일주일째 노력하고 있다. 음지인 47번 사물함에 뒀으면 아마 두부는 안 터졌을 것이다.


“1번 사물함으로 이사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 또한 이상한 생각이다. 이젠 하다못해 나란 인간은 사물함을 탓하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땅이 꺼지면 안 되는데….. 몸이 10분의 1로 작아져서 1번 사물함에서 잠이나 쿨쿨 잤으면 좋겠다.


그래도 1번 사물함을 생각하면 흐뭇할 때가 있다.  

살면서 1등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대학교 다닐 때 공모전에서 1등도 해보고, 회사 다닐 때 경품추첨에서 1등도 해봤다. 청년회에서 회장도 해보고, 교회 부서에서 부장도 해봤다. 그런데 1등의 기억들을 추억하는 건 마치 세 잎클로버에 속에 숨어있는 네 잎클로버만을 찾는 인생 같기도 하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운이라는 것처럼 1등 만을 찾다가 참된 행복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1등 NO.1이 되는 건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린 모두 ONLY 1이다.  누군가에게 1등 남자친구였던 적도 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오빠, 삼촌으로 불린다.친구들에게 하나뿐인 나로 살아간다.  세상에 나란 존재는 유일한 존재니까. NO.1 이 되기 위한 노력은 해야하지만 No.1만을 쫓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하나뿐이 없는 소중하고 보배로운 ONLY.1 존재 인지, 잊지 않고 살아가길 다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꿀잠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