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사립대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다. 전화를 많이 받는다. 입시시즌에는 90% 이상이 학부모 전화다. 학부모들이 입학전형에서 등록금부터 수강신청까지 대학생활의 전반적인 내용을 문의한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학부모가 학교에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왜냐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정도 흘렀을 때, 현직 교수에게 이런 말을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학과 교수들에게 전화를 하는 학부모들이 있더라고요.”
당시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사람들 모두 놀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다는 건 성인이 되는 관문이자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그래서 입학부터 졸업까지의 대학생활에 대해 학부모의 간섭과 개입은 사회적인 암묵적 동의로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랬던 터라 대학 학과나 교수에게 전화하는 학부모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라떼는 그랬더라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전혀 딴판의 세상이 펼쳐졌다. 입시가 마무리되고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 시즌이 되자 엄마, 아빠들이 수강신청 관련 문의전화를 어마어마하게 한다. 몇 학점을 들을 수 있는지, 신입생은 어떻게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지, OT는 언제 가는지, 등록금을 납부하고 OT비용은 언제 내야 하는지, 왜 수강신청 인원을 적게 만들어서 듣고 싶은 과목을 못 듣게 하는지, 하루 종일 수강신청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엄마와 아빠까지, 우리 학부모들은 수강신청 시스템에 분개하며 투철하고 세세하게 항의하듯 물어본다.
심지어 어떤 아빠는 자녀가 신입생 새내기 OT에 갔는데 너무 지루하다고 문자를 받은 후 학교에 전화를 건 경우도 있었다.
"우리 아이가 OT가 너무 재미없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겠지만 원래 그런 건가요?”
한숨이 나왔다. 하하하. 자기 딸이 OT가 재미없다고 그걸 가지고 아빠가 학교에 전화할 일인가? 그럼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어떤 아빠는 자녀가 예비 1번인데, 추가합격 발표를 노심초사 기다리며 학교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화를 받기 전에 어떤 엄마는 딸이 합격을 했는데,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등록만 하고 재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면 연락이 왔었다. 재수는 하고 싶지만 성공을 보장 못하니 500만 원 가까운 등록금을 보증금으로 맡겨주려는 상황이었다.
내 기억에 그 두학생이 같은 과를 지원한 학생이었다. 합격한 학생이 입학을 포기하면 예비 1번 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마음에 안 들지만 잡아주고 싶은 학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들어가고 싶은 학교였다. 그들의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합격한 학생에게 등록포기하고, 다른 학생이 입학할 수 있게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안타까웠다.
그런 학생이 굉장히 많다.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으니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에 반수나 재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는 전화가 많이 온다. 등록만 하고 수강신청하고 학교를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최소학점은 몇 학점인지? 1학기때 휴학이 안되는데, 2학기때는 되는지? 재수를 할 건데, 등록금만 내고 학교는 안 가고 재수할 거라고 말하는 학부모들이 굉장히 많다.
500만 원 가까운 등록금이 전혀 아깝지 않은 듯한 말투라서 놀란다. 반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휴학을 하려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경우는 학생이 전화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지만 등록금을 납부해야 할 기간에 휴학문의를 하는 전화를 받으면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등록금이 워낙 큰 돈이라 한 번에 내지 못해 분할 납부를 신청하는 경우도 많고, 등록금을 한 번에 마련하지 못해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녹아있는 목소리로 전화하는 학부모도 많다. 등록금 내는 걸 깜빡하고 추가 납부를 하는 경우도 많다.
기억나는 여학생이 있다. 수강신청 취소문의였다. 꼭 해야 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표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돈을 벌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학생들, 밤낮으로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많다.
낭만 가득한 캠퍼스 안에는 부모들의 피와 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학생들의 눈물과 고된 일상들이 구석진 그림자들처럼 잔디밭의 들풀처럼 채워져 있다.
다시 학부모들의 전화 이야기로 돌아오면 신기한 건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식을 우리 아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아이….? 20살이 아이인가?' 정말이지 6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아직 결혼도 못하고 자식을 못 낳아봐서 그 마음을 모르는 건가? 입학부터 군휴학, 일반휴학, 복학, 졸업요건, 수강신청까지 마치 대학생 자녀의 비서처럼 모든 것을 챙겨주고 알아봐 주고 처리해 주는 것을 보며 요즘 학부모들의 자녀관리가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대학만 그런가 싶은 생각에 문득 서울대가 궁금했다. 그래서 서울대에 전화를 해봤다. 서울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학부모들에게 전화가 엄청나게 온다고 했다. 요즘 20대 자녀들의 인생에 얼마나 학부모가 온 힘을 다해 신경을 쓰고 관리를 하는 시대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전혀 몰랐던 세상이었다.
그렇게 일단 모두 입학을 하고 1년 뒤에 또 다른 일들이 펼쳐진다. 아까 말했던 등록금을 보증금으로 넣어두고 반수든 재수든 수능을 다시 본 친구들의 결과가 나온 후 학교에 전화를 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는 하늘과 땅차이다.
1년을 재수했는데 결과가 안 좋은 경우, 자녀가 1학년을 제대로 안 다니고 2학년으로 복학을 했는데 어떤 과목을 들어야 하는지 제적을 당했는데 재입학이 가능한지 무덤덤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문의를 한다. 재수든 반수든 실패하고 다시 학교 돌아오는 케이스다.
반대로 재수에 성공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간 학생과 학부모다. 그들은 우선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전화해서 다짜고짜 말한다.
“자퇴하려고 하는데요!”
“우리 아이가 자퇴를 하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마치 더 이상 별 볼 일 없는 학교와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도도한 귀족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뭐 그들의 태도가 어떻든 좋은 결과에는 박수를 쳐주고 안 좋은 결과에는 위로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다시 정시와 수시로 돌아와서 합격자 발표 후 학부모들의 여러 목소리를 들었다. 슬픈 목소리로 추가 모집을 문의하는 엄마들과, 신입생 등록금은 언제 내는 거냐고 밝고 희망찬 목소리로 전화하는 엄마들, 손주가 원서를 냈는데, 어떻게 합격해 주면 안 되겠냐고, 언제 발표가 나냐고 물어보는 할머니도 있었다.
슬픔에 잠겨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 전화해서 추가모집, 예비합격자 순위를 문의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대입에 실패해서 좌절에 빠져있을 자녀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탈지, 그 집 안 분위기가 얼마나 침울할지 수화기 너머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곤 한다.
'지나고 보면 대입에 실패한 게 그렇게 큰 일도 아닌데…..'
요즘에는 대학생활을 아주 아주 보람차게 보내는 학생들이 많다. 깍쟁이처럼 자기 일을 똑 부러지게 챙기며 그 따기 어렵다는 자격증들을 몇 개씩 따서 대기업에 취업하고, 석사, 박사까지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다. 물론, 반대로 졸업학기를 초과해서 남들 4년 다니는 학교를 5년 이상 다니는 학생들도 많고, 졸업만 하겠다는 다짐으로 F만 면할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 별별 학생들의 졸업식이 되면 휘황 찬란한 현수막들로 캠퍼스가 가득하다. 백수축하부터 취업축하, 미모칭찬, 학위칭찬까지 추억과 응원, 이별의 서운함, 미래의 불안함을 그들의 언어로 위트 있게 표현한 현수막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졸업실이 끝나고 2월 추가모집까지 모두 끝나면 이제 진짜 대학생활이 시작된다. 3월이면 새로운 캠퍼스에 학교 타이틀과 전공이 등판에 화려하게 자수된과잠바를 입고 마치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디딘듯 학교에 첫발을 내디딘다. 대학생활 4년 동안 어떤 버라이어티 한 일들이 펼쳐질지 그들의 설레는 가슴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3월이 지나고 4월 중순을 지나 중간고사 시간이 다가왔다. 캠퍼스 도서관에는 열공하는 학생들로 붐비고 학교는 밤에도 활기가 넘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중간고사 기간에는 엄마들이 학교에 전화를 안 한다. 왜일까? 성적이 발표되면 그때 항의전화를 하시려나?
아무튼 오늘 글의 결론을 맺어야 하니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그래도 K 엄빠들 최고라고 맺고 싶다. 대학생활의 핑크빛 로망은 우리 K 엄마들과 K 아빠들의 작품이 아니라고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언제나 우리 K 엄빠들은 최고다!
그리고 오늘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고된 K 대학생들에게도 가슴깊이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