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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배터리는 사랑을 싣고 일본여행기 3탄

고베에서 만난 중국 남자

by 태리우스
KakaoTalk_Photo_2025-10-01-18-51-19 002.jpeg 일본 여행 4일 차 고베




내가 일본여행에서 제일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 충전이었다. 한국은 카페를 가든, 레스토랑을 가든, 햄버거 가게를 가든,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어디든 충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충전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롯데리아나 카페도 충전을 할 수 없도록 콘센트를 막아 두었고, 지하철이나 공공장소는 심지어 콘센트에 작은 열쇠로만 열 수 있도록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충전하려고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있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지만 뭐 이렇게 까지 하나 싶었다.



나의 오래된 아이폰 X는 배터리가 금세 닳아서 틈틈이 충전을 해줘야 했다. 즉흥적으로 떠난 일본여행이었다. 안타깝게도 꼭 필요한 보조배터리를 챙기는 준비성을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오후가 지나면 급속도로 방전되는 스마트 폰을 배터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껴가며 쓰고 있었다. 맘껏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도 없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 마지막날 고베에서는 점심시간부터 배터리가 바닥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하루만 버티면 됐지만 아무리 찾아도 충전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결국 보조배터리를 사기로 결정하고 전자제품 가게를 둘러봤는데 그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고베항에 다이소가 보여서 들어갔다. 일본의 다이소는 한국의 홈플러스처럼 규모가 컸다.


일본 다이소 보조배터리는 가격이 비쌌다. 한국에 보조배터리가 있는데 쓸데없는 지출을 하게 되자 낭비처럼 느껴졌다. 고민이 됐지만 어쩔 수 없기에 적당한 가격의 제품을 사기로 마음먹고 결재를 하러 갔다.


체크카드가 두 개가 있었는데, 돈이 들어있는 주거래 통장 카드는 VISA 마크가 찍혔는데도 일본에서 결재가 안되었다. 다행히 MASTER CARD 마크가 찍힌 다른 카드는 결제가 가능했다. 그래서 돈이 모두 들어있던 카드계좌에서 다른 카드로 필요할 때마다 이체하며 결제를 하고 있었다. 보조배터리를 들고 카운터에 가기 전에 돈을 이체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폰이 꺼져버렸다. 결국 보조배터리를 못 사고 다이소를 나왔다. 폰도 안되고, 카드도 안되고, 지갑에는 한화 5만 원이 있었다.



나는 5만 원 지폐를 들고 한국 관광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귀를 쫑긋 세우며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의 레이더망에 잡히길 바라며 한국인들을 탐색했다. 다행히도 몇 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레이더에 잡혔고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5만 원을 보여주며 환전을 요청했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죠? 제가 카드가 안되는데 엔화가 없어서요. 이 5만 원 엔화로 바꿔줄 수 있으신가요?"


내가 찾아낸 한국인들은 모두 엔화가 한 푼도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을 아껴서 관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의 부실한 준비성 때문에 일본까지 여행 와서 한국돈이나 바꾸고 앉아있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스마트폰 배터리 걱정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떻게든 빨리 폰을 켜야, 뭘 해도 할 판이었다.


그나마 스타벅스 같은 글로벌 체인점은 충전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카드를 못쓰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물 벽면에 숨겨진 콘센트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며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지친 마음에 고베항 터미널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봤다. 보조배터리를 갖고 다닐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중년 이상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KakaoTalk_Photo_2025-10-01-18-51-21 005.jpeg 고베항 대관람차



그때 어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나는 다급했기에 영어로 보조배터리가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나를 보더니 무관심한 태도로 없다고 했다. 실망한 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싶은 생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남자가 내게로 오더니 보조배터리를 내밀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가 올 때까지 사용하라고 했다.


가뭄으로 메마른 흙밭에 한 줄기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았다. 온종이 우중충한 회색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밝은 해가 비치듯 내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연거푸 고맙다고 했다. 진심으로 그가 고마웠다. 그 남자의 친구가 올 때까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충전을 해야 하기에 서둘러 케이블을 꽂고 충전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 방전된 상태에서는 첫 화면이 켜지는대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가방을 벤치에 두고 그에게 줄 음료수를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갔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기에 시원하고 맛있어 보이는 페트병 음료 두 개를 골랐다.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나왔는데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가 벌써 왔는지,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 충전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버렸네.....'


충천이 얼마나 됐는지도 알 수 없기에 서운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힘없이 터벅터벅 가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자리에 가보니 보조배터리가 폰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뭐지?'

주위를 둘러봤다. 터미널 안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 유리창 너머 바깥을 보자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에게 보조배터리를 건넸다. 그는 잠깐 담배 피우러 나온 거라며 계속 충전을 하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내가 산 음료수를 보여주니 그는 사양했다. 가방에 이미 음료가 많다고 했다. 우린 서로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일본 고베에서 일을 하는 중국인이었다. 건설 노동을 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조배터리도 흙먼지 같은 게 묻어있었다.


일본에는 건설 노동자처럼 현장직원들이 즐겨 입는 옷이 있다. 얇은 바람막인데, 허리 부분에 작은 선풍기 같은 장치가 달려있다. 선풍기를 작동하면 바람 때문에 바람막이가 눈사람처럼 부풀어 오른다. 시원한 바람을 점퍼 안으로 계속 주입하여 온도를 낮춰주는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한 여름에 왜 옷을 빵빵하게 입는지 의아했지만 알고 보니 그런 기능이었다. 우리보다 적도에 더 가까운 오사카 지역은 한국보다 훨씬 더웠고, 현장직 노동자들은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그런 기능성 옷들을 많이 입고 다녔다. 그도 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대화를 하던 중에 그가 기다리던 친구들이 왔다. 친구가 아니라 친척처럼 보였다. 친근해 보이는 가족들과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들과도 잠시 인사를 나누고 보조배터리를 돌려주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 남자는 고맙게도 충전을 더 하라며 고베항 터미널로 다시 날 돌려보냈다. 나는 돌아가서 열심히 충전을 하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돌아오고 나는 보조배터리를 건넸다. 그런데 그가 보조배터리를 나에게 도로 주며 가지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보조 배터리가 몇 개 더 있어서 괜찮다며 사람 좋은 얼굴로 받으라고 했다.


'이 사람 대인배 중국인이다!'


보조배터리를 빌려준 것도 고마운데, 선물로 준다니! 고베항에 펼쳐진 바다 같은 사람이 있나 싶었다.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기에 오히려 받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극구 괜찮다며 배터리를 돌려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조배터리를 도로 받아 들고 작별인사를 했다.


고베항 터미널을 나와서 다시 다이소로 가려고 하는데 후회가 되었다. 다이소에서 3만 원을 낭비하는 것보다야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의 선물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엔화 동전들이 여러 개 있었다. 한화로 계산해 보니 만원정도 돼보였다. 그에게 다시 돌아가서 동전들을 주며 중고로 팔라고 했다. 그는 괜찮다며 그냥 받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던 꼬마에게 동전들을 쥐어주며 도망치듯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유명한 연예인은 아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러 번 본 듯한 배우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사실 동네 건달이나 양아치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었다. 혹시 내가 말을 걸면 시비를 걸지도 몰라서 겁이 났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용기를 내고 물어봤지만 역시 무관심하고 무심한 듯 없다고 말했던 그였다. 시비를 안건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랬던 그가 왜 자신의 보조 배터리를 빌려주기로 했던 걸까? 충전을 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워하는 내 마음을 이해했던 걸까? 그의 첫인상과 달리 심지어 보조배터리를 나에게 선물해 줄 만큼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남자였다.


중국사람들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관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상대를 철저하게 불신하지만 관계가 형성되면 상대를 끝까지 신뢰한다고 한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열었던 걸까? 처음에는 불쌍해 보여서 빌려줬는데, 내가 음료수까지 사들고 와서 감사를 표현하니까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던 걸까? 굳이 보조배터리를 주지 않아도 되는데, 처음 본 사람, 앞으로 영원히 못 볼 사람에게 이러한 친절과 호의를 베풀 수 있는 힘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누군가의 필요를 정확히 파악하여 완벽한 타이밍에 채워주는 능력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뛰어난 능력이다. 상대방은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세상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는 듯하다. 타인의 필요보다 자신의 필요와 만족에 몰두하고 집중하며 타인은 무관심하게 여긴다.


그의 호의는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한 사람의 행동은 미약해 보이지만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그 힘은 심지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그의 친절은 도미노 같다. 그의 배려로 나도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또 다른 사람에게 친절이 전달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타인을 향한 배려, 친절, 도움들은 도미노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칩이 된다. 그 도미노를 사랑의 도미노라고 하고 싶다. 그가 나를 향해 첫 도미노를 쓰러뜨린 것처럼 나도 그 뒤를 이어 누군가에게 배려, 친절, 도움을 전달하는 사랑의 도미노 칩이 되고 싶다. 반대로 도움을 받고선, 입을 씻고 오히려 인색하고 이기적이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가진 것으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평범한 나는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KakaoTalk_Photo_2025-10-01-18-51-23 008.jpeg 고베 철인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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