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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pr 27. 2020

선생님 약 줄여준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양극성 장애 a.k.a 조울증 환자입니다



"선생님 너무 몸이 힘들어요. 자도 자도 자고 싶고 근데 자고 나면 개운하지도 않아요. 평소보다 잠을 많이 자니까 죄책감도 들고 짜증도 나고 요즘 정말 예민해요."


소파에 앉자마자 쏟아지는 불만들에 화가 나실 법도 한데 선생님은 ^온화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럴 수 있지요, 약 복용량을 늘렸으니까 차이가 더 크게 느껴졌나 봐요." 아니 선생님,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누구는 답답해 죽겠는데 뭐가 그럴 수 있지요-입니까? 


"근데 진솔 씨, 진솔 씨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요 다른 사람들 다 그 정도 자요. 아니 그것보다 더 자요. 이게 정상인 거예요."


아니, 누가 정상 비정상 따지자고 했습니까? 머리통을 부여잡고 고개를 휘저었다. 나는 스스로 정한 날이 아니면 5시간 이상 자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열심히 살지 않았어, 제대로 살지 않았어 등과 같은 자괴감이 밀려온다.


"제가 너무 답답해요. 스스로한테 너무 화가 나요."


이러다 울음까지 터지겠다 싶어서 마음을 꾹 눌렀다. 나는 얼마 전 양극성 장애, 쉬운 말로 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다. 현재는 조증 기간의 마무리 즈음에 와 있고 다가올 우울 삽화를 대비 중이다. 몇 년 동안 우울증 환자로 지내면서 내가 우울 삽화에서 얼마나 많이 무너지고 망가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조절하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우습다? 편하고 익숙한 방식이 아니면 괴롭다. 옳지 않은 길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 길이 내 길 같고, 그 길로 가야만 할 것 같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때요? 여전히 많이 들어요?"

"아뇨, 근데 그냥.... 제가 싫어요. 약을 늘린 이유도 알고 일부러 잠을 자는 약을 넣어주신 것도 아는데, 다 아는데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너무 힘들어요."


우울 삽화 기간, 약 2년 만에 자해를 했고 병원을 가기 이틀 전부터 조증 증세가 심해졌다. 우울증일 때도 조울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남자 친구가 알아차릴 정도로 업다운의 차이가 심했다. 처음엔 불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루 30분을 자도 에너지가 넘치고 연구 참여부터 독립출판 시작까지 혼자 온갖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소비 욕구는 하늘로 치솟았고 평소엔 관심도 없던 것들을 "지금 당장 꼭 필요해!!!!!!!!!" 라며 사들였다. 어딘가 멍하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고 의사 선생님은 내게 "조증 기간인데 좀 심한 편이에요, 약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다음 우울 삽화 때 엄청 힘들 수 있어요."라며 그동안 먹었던 약들과 조금 다르게 생긴 약을 처방해주셨다. (약 설명은 언젠가 필요하면 하겠다.) 첫 주는 큰 효과가 없었다. 약을 조금 늘리면서 2-3시간이지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3주 차엔 조금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4주 차, 복용량은 매주 늘었고 결국 자도 자도 피곤하고 깨어 있는 시간에도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날들이 이어졌다. 울고 싶지도 않고 죽고 싶지도 않은데 이게 사는 건가? 이게 살아있는 거야?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꼭 복용량을 줄여달라고 말해야지!!! 단단히 마음먹고 병원에 갔다. 


"진솔 씨는 충분히 자기 조절 감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약을 먹으면 계속 잠이 오고 식욕도 오를 수 있는데 식사일기 쓰면서 달래고 조절하고 있잖아요. 아직 적응 기간이라 그런 거예요. 하지만 너무 힘들다면 조금만 줄여볼게요."


자기 조절 감, 아 - 탄식이 새어 나왔다. 

자기 조절을 너무 좋아해서 병이 생겼다. 몇 년에 걸쳐 섭식장애 회복인이 되었으니 식사 일지도 강박이 될까 싶어 애매한 날엔 쓰지 않는다. 근데 자기 조절... 또 자기 조절이라니 울고 싶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아니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누가 알려줬으면 싶다. 약을 먹으면 감정이 내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감각이 너무 싫은데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해낼 수 없다. 우울 삽화였다면 "이럴 바엔 차라리 죽겠어."라고 생각했겠지만 다행히도 약 덕분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진 않는다. 물론 전부 약 덕분은 아니다. 내 노력도 있다. 일기를 쓰고 마음을 돌보고 상처 내고 싶은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너무나 나약해.


"살이 찔까요? 살이 찌는 건 정말 싫어요. 빠지길 원하지 않는 것처럼 저는 여기서 더 찌는 것도 싫어요. 식욕이 솟을 때마다 끔찍해요. 아 너무 무서워요."


기저에 깔린 섭식장애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는 회복했지만 여전히 그와 같이 살고 있다. 두려운 마음에 누군가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아팠다. 의사 선생님은 그럴 수 있다며 약을 조금 줄여보자고, 식욕 돋는 게 너무 싫으면 약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만 한다면 잘 해낼 수 있다고 다독여 주셨다. 폭식하고 싶을 때, 먹고 토하고 싶을 때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려고 노력한다면 속지 않을 거라고, 잘 해낼 거라고.


그렇게 짧은 상담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병원에 다녀온 날은 항상 마음에 말들이 가득 차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런 날이었다. 인스타에 병원 일기를 쓰고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 요가와 명상을 하고 약을 먹으려고 꺼내니, 으잉? 약이 지난주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선생님 정말 줄여 주신 거 맞아요?



내일 전화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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