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니까 까짓것 20대 정리해보자.
스물아홉, 한 살 한 살 뒷자리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조급함과 두려움도 같이 쌓였다. 친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1년 2년 3년, 단단한 시간을 만드는 동안에 나는 무엇을 했지? 먹고 토하고 체중계에 올라가는 일말고 '나'를 위해 무엇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뭐 하나 끈덕지게 이어온 일이 없다. 사람들은 일본도 다녀오고 호주도 다녀오고 여러 경험을 하지 않았냐고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었지만 그 내막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당사자로서 그 칭찬을 '하하하 그렇지요, 그렇네요.' 라며 받아들이기엔 내가 생각보다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20대 초반엔 열심히 춤을 추러 다녔다. 격일로 부산에 있는 클럽과 감주를 헤집고 다녔고 외박하는 횟수도 잦았다. "클럽은 새벽 2시부터 피크 아니니?"라는 어머니의 명언과 함께 겁없이 술을 마시고 운동이 필요없을만큼 온 몸을 흔들며 춤을 췄다. 사람들은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냐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운드'였다. 스피커 앞에 있으면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물론 관심을 받으면 좋긴했다.) 다들 미치고 싶을 때가 있고 클럽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면서 좋아한다고 손을 잡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준 적은 없지만 어찌보면 크게 따지는 것 없이 '그냥', '일단 지금'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무모함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화장이 엉망진창으로 번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도 좋았다.
그 땐 그 청춘이, 그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하는 말 중 하나가 "나는 스물 다섯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인데, 진심이다. 초등학생 때는 어른이 되면 알아서 직업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몇 살에 그렇게 될지는 몰랐다. 스무살이 되면 뭔가 마법처럼 "짠! 나는 이제 어른이야!" 라며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지. 그리고 중3때부터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하고 바보같은 생각이었는지 온 세상이 알려주는 듯한 과도기를 맞이했다. 어른이 되는 건 오질나게 귀찮고 어렵고 머리 아픈 일이구나, 그래서 난 25살이 되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 이상의 삶은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16살부터 먹토를 시작했고 25살부터 커팅자해를 시작했으니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 어쩌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최악의 2년이 아니었을까?
그 해의 모든 일들이 최악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 때 만난 인연들 중 대부분이 지금까지 내 일상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채우고 있고 자신있게 '내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너무 힘들었다. 매분 매초가 지옥이었다.
살아있음을 스스로 부정했다. 살아있으면 안된다고 나 같은 건 죽어야한다고 어느 때보다 가장 자주 많이 토했고 토하는 걸로도 부족해서 몸에 상처를 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의존이었고 결국 또 다른 감옥으로 변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면 그게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없었다. A가 되기도 하고 B가 되기도 하고 Z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정체 모를 우울과 고립감에 다시 죽음을 빌었다. 곧 대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거고 직업을 가진다는 건 '내가 가진 것'을 활용한다는 의미인데 나는 가진 게 없었다. 살아낸 것 외엔 내세울 게 없었다. 그렇다고 이력서에 가정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순 없지 않나? 그러면서 자괴감은 더욱 짙어졌다. 검게 물든 세상이 곧 내 세상이었고 나는 죽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아서 매번 애매하고 어리숙한 상처들을 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이런 나를 받아줄 것'처럼' 보이는 곳을 만났고 약 1년을 그 곳의 규칙과 논리를 배우고 익히며 지냈다. 좋았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겁쟁이가 지내기 딱 좋은 곳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살아가기엔 내가 제일 이상하고 모자란 사람이었기때문이다. 그러다 '죽음'에 대한 이야길 나누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죽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살렸다. 끝없는 삶은 아무리 행복해도 결국 '살아내야 하는 숙제'와 같아서 죽지 않는다는 게 너무 싫었다. 죽고 싶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삶의 끝이 없는 건 아무래도 싫었다. 그래서 나왔다.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그 친구의 목적은 애초부터 사랑이 아닌 전도였다. 나오는 과정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던 사랑을 잃었다. 아니, 없었다는 걸 알았다. 사랑은 없었다. 결국 이윤이 남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다.
그렇게 스물여섯이 되었다.
억울했다. 억울해서 마음을 다잡았다.
2017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6년만이었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유튜브에 섭식장애에 관한 영상을 올렸고 내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물론 한번에 모든 게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나약했고 자주 토했다. 그래도 평생 생각만 하던 것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전공이 아니니까, 자격증이 없으니까 안될 거라며 미뤘던 일본 취업에 도전했다. 일본만 아니라 국내, 싱가포르, 라오스 등등 되든 안되든 이력서를 넣었고 지금 읽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수준의 자기소개서를 썼다. 근데 이상하지? 재밌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취업은 신기루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뭐라도 하려는 내가 좋았다. 되든 안되든 일단 시작하는 내 모습이 낯설지만 대견했다. 이 모든 도전의 시작은 남자친구의 영향이 컸다. 남자친구는 50만원도 안되는 돈을 들고 호주로 떠났다. (당시엔 금방 헤어질 줄 알았다ㅎㅎ) 어떻게든 일을 찾고 바퀴벌레들이 집주인 행세를 하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내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를 알았다면 애초에 이러고 있지 않았을거야.
모르겠어서 일단 뭐라도 해보는 거지.
나는 항상 정답을 찾아다녔다. 삶에 답은 없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정답인마냥 그들의 이야기를 쫓았고 좌절했다. 나는 절대 그 사람들이 될 수 없으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역으로 그들은 내가 될 수 없다. 그 땐 그걸 몰랐다.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나'라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가치를 몰랐다. 그냥 안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남자친구는 달랐다.
그냥 안되는 사람은 없다고, 해보지 않으면 왜 안 되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냥 안되는 건 그냥 안하는 거라고.
만약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했다면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신은 날 모르니까, 내 상황을 모르니까' 라고 늘 사용하던 방어기제를 꺼내 도망쳤겠지. 합리화하고 방구석에 쳐 박혀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토록 좋아하는 '사랑'의 상대였기에 그 말의 힘은 매우 컸다. 시기적으로도 변화를 바라고 있었지만 익숙한 방식을 택하는 게 당연한 인간이기에,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깨달은 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고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노력을 했고 애매하지만 썩 빠지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눈을 떠 탈락 이메일을 쓰레기통에 넣을 때마다 자괴감이 올라왔지만 한바탕 울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지난 번에 썼던 자기소개서를 열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일본 홋카이도의 공항 인포메이션 포지션에 합격했다.
결론은? 2018년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어디에 있든지 내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10년 가까이 꿈꿨던 일본생활은 이미 바랠대로 바래버린 미련이었고 호주는....뭐 남자친구 때문에 간거니까 남자친구와 함께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서 돌아온 게 컸다. 돌아오니 다시 모든 게 '0'이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썼다. 내 안엔 분명 여러가지 것들이 쌓였지만 그게 무엇인지 당장은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야' 하고 싶은 건 없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인지 정도....만 알았달까?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하고 나니 결론이 났다. 돌아와 부모님 눈치를 보다 부산 해운대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병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섭식장애의 뒤에 숨어 있던 오랜 우울과 자살사고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했다. 심한 우울증 그리고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진단과 치료는 달라서 맞는 병원을 찾기 위해 병원도 3번정도 바꿨다. 약물치료는 효과가 있었지만 근원적인 부분을 해결해주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지금'을 위한 치료일뿐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이야긴 아니지만 평생 약을 먹고 살 순 없었다. 아니 죽음을 생각하다 그런 스스로를 미워하다 아닌 척 하다 더 망가지는...그런 악순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쯤은 몇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왜 상담 공부가 하고 싶은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지난 과거를 들춰 해결해야하냐고 ㅎㅎ 나무라기도 했다. 아빠랑 머리를 쥐어 뜯으며 싸우고 엄마에게 수도 없이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영영 변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 아픔이 그 시절이 나의 정체성같아서 놓기 싫기도 했다. 아프지 않으면 내가 아닌데 슬프지 않으면 삶이 아닌데 하며 나를 묶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약물을 통해 괜찮아지는 나를 보면서 변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변하고 싶지 않은 거였고 '피해자 포지션'을 버리면 그냥 '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무서웠다.
'불행에 중독된 사람' 나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지 않을까?
행복하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다녔다. 아마 겁쟁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겁쟁이라서 느리고 느려서 많이 주저하고 주저하다보니 많이 해멨다. 헤매다 보니 여기저기 많이 찌르고 다녔고 넘어지고 다치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 온 것 같다. '죽고 싶다' 라는 대전제는 바뀌지 않았지만 죽지 않고 참 많은 일을 했다. 끝까지 해내지 못한 일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하니까 경험이 되고 경험이 쌓이니까 데이터가 됬다. 왜, 촉(감)은 지금까지 살아온 데이터 베이스라고 하잖아? 일단 해보면 뭐라도 나온다. 그게 내 데이터 베이스의 평균값이었다. 불행에 중독이 되었든 먹고 토를 하든 살이 찌든 말든 되는 대로 하다보니 나는 회사랑은 안 맞는 사람이고 (회사와 맞는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회사는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끊임없이 반추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니까 원없이 그걸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찾다보니 대학원이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10년 전, 학부 졸업할 때만 해도 다시는 상담 쪽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던 내가 제 발로 상담심리 대학원에 지원하는 뭐 그런 아이러니하고 웃긴 결론이었다.
왜 상담 대학원이었을까? 유튜브의 영향이 가장 컸다. 섭식장애 관련한 영상을 올렸고 그 영상이 약 19만회의 조회수를 찍었다. 아마 섭식장애 이야기 영상 중 가장 높은....영상이지않을까 싶은데 그 파급력은 생각보다 컥서 3년이 지난 지금도 섭식장애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고 영상을 올리고 있다. 인터뷰를 하고 사람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나를 죽도록 괴롭히던 이 병이 어쩌면 내가 가진 자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일까? 섭식장애의 시초였던 가정폭력, 학교폭력 역시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내 능력의 중심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이라는 같은 단어였지만 그 속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불쌍해 불쌍해' 노래를 부르던 정체성에서 '괜찮아질 수 있어, 행복할 권리가 있어'의 정체성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잘 못할 것 같다며 밤마다 울었고 입학하고 나서도 자퇴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제대로 다루기는 무슨, 여전히 고통은 고통이었고 상처는 상처였다. '능력'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변경 가능한 날들이 아니었다. 1학기는 2016년과 비슷한 수준의 암흑기였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상처를 내고 '양극성 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다. 대학원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능력? 능력같은 소리한다며 비웃었다. 애초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스물 아홉에 이러고 있진 않을거라고 또 다시 자책의 늪으로 기어 들어갔다. 포털 사이트에 대학원 자퇴를 수도 없이 검색했다. 하지만 자퇴할 수 없었다. 자퇴하고 나서 뭘 해야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은 많지 않지만 적지도 않은 나이었다.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다시 해외에 나가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울며 불며 꾸역꾸역 학교에 갔다. 수업을 듣다가 울음이 터져 집에 돌아간 적도 있다. 거기다 대학원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을 해야했다, 교수님이 주신 일들이 있었다. 이상하지? 그걸 내팽겨치고 도망칠 위인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수님이 내 유튜브 채널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1학기가 끝나면 무슨일이 있어도 자퇴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방학에도 일은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나가 심리검사 해석강의를 했다. 섭식장애 연구도 마무리 되지 않았다. 나는 방학에도 자퇴하지 못하고 대학원생이었다.
샘 우리 MMPI검사 받아볼래요?
대학원 동기 선생님이 학기가 끝날쯤 학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심리검사와 해석상담을 받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료라길래 별 생각없이 했는데 그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검사 결과는 엉망이었다. 해석상담 때 상담샘이 어떻게 학교 생활을 했냐며 휴학을 권하셨다. 그즈음 병원에서도 입원을 고려해보라는 이야길 들었는데 내 상태가 엄청 심각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내가 원래 우울한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우울에도 정도가 있었고 나는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아픈 환자였다. 방학동안 일을 하면서 약물치료와 함께 상담을 병행했다. 그 때 나와 선생님들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해야하는 일만 하기.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쉬기. 무조건 나를 칭찬하기.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조건!!! 다!!!"
나는 지금까지 리스너였다.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조언을 구하면 다들 엄청 조심스러워했다. 내 고민이 조금 무겁기도 했고. (맨날 죽음이나 폭력이야기를 하니까...) 그래서 항상 나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리는 것에 익숙했는데 상담은 달랐다. 새로운 병원도 30분 정도 상담을 하고 약물을 처방해줘서 이러나 저라나 계속 내 이야기를 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수도 없는 "왜?"의 반복이었다. 나에겐 당연한 일들, 생각들이 선생님들에겐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사고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안된다고 생각하고 못한다고 생각하고 잘못됐냐고....묻고 묻고 또 물었다.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 과정을 통해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누구보다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주일에 두번씩 그 발목을 바라보는 일은 굉장히 낯설고 어렵고 ㅎㅎ 꽤 괜찮은 작업이었다.
그렇게 방학이 끝났다. 나는 대학원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게 되었고 상담은 이어졌다. 늘어나는 병명으로 약물치료는 잠시 쉬기로 했지만 언제든 힘들면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약물치료'에 대한 생각도 유연해졌다. 2020년 2학기는 그렇게 시작됐고 기회와 경험의 파도들이 미친듯이 밀려왔다.
나는 나를 믿어주고 싶었다. 믿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