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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pr 11. 2021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이 글은 자해 트리거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일찍 잠들었다면 괜찮았을까?

본인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보리를 붙잡고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괜찮았을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괜찮았을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면 괜찮았을까?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시간, 나는 집 근처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응급약품세트에 들어있는 붕대를 팔목에 감고 있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 전에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생각보다 깊게 베인 상처때문에 놀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울지 않았다. 커팅자해는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피부가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그건 정말 충동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충동을 참지 못해 저질러 버린 행동이었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보다는 뒷처리가 문제였다. 급하게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응급실에 가서 메야 하나?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과산화수소로 소독을 하고 마데카솔 가루를 뿌리고 방수 밴드를 붙였는데 그래도 자꾸 피가 났다. 그제서야 무서워서 붕대를 감고 가만히 앉아 일이 왜이렇게 된건 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해를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자해한다 = 죽고싶다' 라고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해와 자살시도는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다. 나는 자살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팔목이 아니라 손목 or 가방에 모아둔 약들을 털어넣었겠지. 오늘 새벽의 행동은 명백한 자해였다. 나를 해하기 위한 행동.


사실 나를 해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으니까.  타인에 대한 분노로 마음에 불이 난 상황이었다. 그건 나를 '죽이기 위해서' 보다 '살리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감정의 구렁텅이에 빠져 울기만 하는 내가 싫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그와 별개로 나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싶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최근엔 논문 계획서를 쓰느라 바빴다. 계획서도 써야하고 수업도 들어야 하고 과제도 해야하고 일도 해야하고 상담도 해야했다. 내 마음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해야하는 일들이 매일매일 이어졌고 그걸 다 쳐내기도 버거운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좋았다. 뿌듯했다. 도망가지 않고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그 모든 걸 해내려고 애쓰는 내가 대견했다.


근데 왜?


대견함과 별개로 나는 나를 생각해주지 않았다. 안아주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끔찍히 챙겼다. (사실 끔찍히까진 아니다. 조금 과장했다.) 왜그랬냐고? 좋았으니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았고 소중했다.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고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래봤자 타인인데, 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었겠냐만은 마음을 쓰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아니 사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지내온 말들이 오늘 새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 논문 주제는 '섭식장애'다.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대학원에 진학한 가장 큰, 어쩌면 유일한 이유가 바로 섭식장애와 관련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학위논문 주제가 되었다. 아주 뚜렷했다. 내가 바로 섭식장애 환자였고 15년동안 섭식장애와 함께 살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유튜브나 블로그 활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거야 말로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수님들을 뵐 때마다 질적 연구와 글쓰기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주제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내가 워낙 확고하고 교수님들도 '경험한 사람'으로서의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주제를 정하느라 고민하고 공부하고 교수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때 나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들이 안되면 어떡하죠? 뭘 해야 하죠? 이걸 해도 괜찮을까요? 누구보다 열렬히 고민할 때 나는 그 고민에 함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선생님들과 함께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간을 내고 애정을 쏟았다.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거고 앞으로도 선생님들과 함께 끝까지 잘 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들었던 칭찬 비스무리한 말들이 마음에 박혀 빼내려 할 때마다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좋겠어요. 주제가 확고하잖아요."

"선생님이 부러워요. 교수님들이 뭐라고 하지 않으시잖아요."

"선생님은 빨리 정해져서 다행이요. 좋겠다."


처음엔 괜찮았다. 맞는 말이니까. 나 역시 선생님들이 주제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근데 자꾸 그 말이 내 눈물샘을 건드렸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났다.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밥먹다가 울고 버스에서 노래 듣다가 울고 길을 걷다가도 자꾸 눈물이 나서 주저 앉아 울다가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너무 엉엉 울어서.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만큼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섭식장애가 아니었다면, 가정사가 아니었다면, 그 새끼가 없었다면 상담 공부를 하지 않았을텐데 외국에 나가서 전혀 다른 일을 했을 것 같은데....하고 싶었는데"


상처였다. 좋겠다, 부럽다 라는 말들이 상처가 됐다. 나는 하나도 좋지 않아서. 다행이지 않아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게 싫어서. 섭식장애와 멀어지기까지 약 15년이 필요했다. 가족과 나를 분리해서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논문 주제를 정하기까지 15년이 걸린 셈이다. 그 과정은 전-혀 좋지도 행복하지도 다행이지도 않았다. 논문을 쓸 수 있게 된 지금이 다행인 건 맞지만 쓰지 않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애초에 아프지 않았다면 생각하지 않았을 거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삶을 바랐다. 바란다고 해서 다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몰아치는 파도에 온 몸이 따가워도 상처에 상처가 더해져 쓰라려도 견뎠을 뿐이다. 해가 나면 괜찮겠지? 아니 해가 나면 상처는 더 따가웠다. 좋아하는 것들도 나를 아프게 했다. 인생은 그런 거였다. '온전한 좋음'이 없는 것.


깨닫고 나니 미친듯이 슬펐다. 정말 미친듯이 슬펐다.

울고 울고 울고 울고 울고 울고 계속 울었다. 목소리가 쉴 정도로 엉엉 울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젠장, 다 그만두고 싶었다.여전히 슬픈데 그 슬픔을 억지로 참고 무시한 대가였다. 진짜 머리가 너무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이명이 들리고 떠오르는 건 오직 절망뿐이었다. 신나는 노래를 틀어보고 좋아하는 가수의 영상을 봐도 시발, 시발, 시발 계속 욕이 나왔다. 감정에 파묻힌 사람 같았다.


"나 진짜 힘들었어. 나 정말 아팠어. 죽을 것 같았아. 하나도 쉽지 않았어. 시발 안할 수 있으면 안하고 싶었어. 죽을 수 없어서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일인데 왜 하면 할수록 내 아픔이 무시당하는 것 같지?"


무서워졌다. 교수님 앞에 서서 이 연구를 허락해 달라고 말 할 자신이 없어졌다. 교수님들이 '연구'를 위해서 던질 질문들이 벌써부터 아팠다. 나는 내 아픔을 증명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닌데 아픔을 증명하고 싶어지고 내가 존-나 힘들었다는 걸 사람들이 1도 신경쓰지 않을까봐 무서워졌다. 이 연구는 결국 이미 흘러버린 15년에 대한 애도인데 그 애도가 타인의 의견으로 인해 시작도 못하고 끝나는 건 아닐까? 감정적으로 대답하면 연구는 감정으로 하면 안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제일 싫은데. 동정받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제일 싫은데 어떡하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상처를 낸 후였다.


놀랍게도 상처를 내자마자 이성이 돌아왔다. 갑자기 등골이 싸해지고 머리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놀라 그동안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파야 하는 건 내가 아닌데"


웃겼다. 웃음이 났다. 헛웃음.

수건으로 지혈을 하면서도 허허허 웃었다. 서른이 되어서도 이러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여전히 내 마음, 내 감정 하나 제대로 컨트롤 할 줄 모르는 내가 웃겨서 웃었다. 왜 아픔을 자처해? 니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너는 알잖아.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너는 네가 힘들었다는 걸 알면서 왜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고 또 상처를 내? 웃기고 자빠질 일이었다. 편의점에서 사온 것들로 간단히 응급처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정신차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양치질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뭐 잘 준비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빛에게 전활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나는 상처가 더 벌어질까 팔을 살짭 굽힌 채 자리에 누웠다.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 전에 집을 나서야지.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눈을 뜨니 9시즈음이었다.

꿈이었을까? 꿈이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자는 동안에도 계속 피가 났는 지 어제 감아놓은 붕대 색이 조금 변했다. 붕대를 풀고 밴드를 때서 보니 제대로 흉이 질 모양이었다. 다시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이고 붕대를 감았다. 간단히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밤새 우는 언니 옆에서 영문도 모른 채 같이 견뎌야 했던 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리야 고마워, 언니 이제 갈게. 다음엔 더 괜찮아져서 올게. 미안해."


오늘은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예전이었으면 보란듯이 상처를 드러내고 만났을테지만 이번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는 것도 싫고 하나 하나 설명하기도 싫었다. 일이 있어서 못만날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내고 버스를 탔다. 유라에게 카톡을 했다. 이 상황을 아무말 없이 들어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라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학교로 가야하나.? 고민하다 바다에 가기로 했다. 지금은 다대포해수욕장 앞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팔목 한번 그었다고 감정이 정리될 수 있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꽤 정리가 된 것 같다.

상처를 내고 나니 명확해졌다.

나는 차가워져도 된다.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아픔을 남에게 증명하거나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 그건 내 몫이다. 아픔을 잊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다 내 몫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타인에게 그 주도권을 내어주지 말자. 칭찬은 칭찬으로만 듣자. 의미부여 하지 말자. 결국 다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소화하는 '나의 과정'이 만든 결과가 오늘 새벽이다. 기대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사랑하되 사랑받는 걸 보상으로 두지 말자. 친절하게 모두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자. 친절하든 안하든 이해는 내 몫이 아니라 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번 상처는 아물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샤워는 어떡하지?

결국 다음주엔 만나야 할 남자친구는 어떡하지?

걱정되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어쩌겠어. 이미 나버린 상처인걸? 낫기를 기다릴 뿐이지.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상처를 냈다곤 하지만

다음엔 꼭 상처내지 말고 견뎌보자.

마음의 파도는 마음에서 처리하자. 보내자.


속상하지만 자책하진 않을래.

애썼다. 솔아.

해보려고 노력한 거 잖아.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애썼잖아. 그러니까 끝까지 가자. 해보자. 네 목적만 생각해. 네가 대학원에 온 이유는 증명하기 위해서도 동정받기 위해서도 이해받기 위해서도 아니야.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 그치? 그것만 생각해. 그게 제일 중요해.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네 곁에서 함께 해온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리고 누구보다 스스로 제일 잘 알잖아.




결코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걸.

그 날들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살아보려고 지금까지 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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