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달리고 있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지? 끝은 어디에 있지? 끝은 무엇이지? 끝은...있나?
그리고 나즈막이 뱉는 한 마디, "왜 살아있지?"
상담은 조언을 주는 일이 아니다. 조언 할 바에야 침묵을 유지하는 게 낫다.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에게, 죽고 싶다는 사람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이 필요할까?
거창한 말은 필요하지 않다.
손을 잡아줄 수는 없지만 의자를 살짝 당겨 앉아 책상 위의 손을 조금 더 가까이 옮긴다.
숨 좀 쉬고 싶다. 그쵸?
숨이라는 단어에 자연스레 호흡을 뱉게 되고 다시 숨을 들이 마실 때, 우리는 종종 눈물을 흘린다.
이 단순하고 별 거 아닌 숨이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호흡마저 잊은 채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 짧은 숨 한번 고르지 못하게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던가
살아있음에 무감각해질만큼 살아오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들에 비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나의 지난 날이 비참할 정도로 보잘 것 없어서 '죽음'말고는 다음을 생각할 수 없었던 날이 있었다. 언제 따라잡지, 어떻게 살아야하지, 뭘 해야하지, 자신에 대한 의심은 계속 늘어만 갔다. 있는 그대로의 나, 아무것도 아닌 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끔찍했다. '텅 빈 껍데기'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하지만 '텅 빈' 그 상태야말로 시작하기 가장 좋은 상태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물론 좀 늦게 알긴 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다. 내가 될 수 있다. 0(zero)의 나를 마주해야만 우리는 다음으로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기다려줘야 한다. 충분히 실망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그러다 문득 '그럼 이제 어떡해야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다시 걸을 수 있다. (처음부터 달리지 말자. 걷자. 관절에 무리가는 일은 가능한 줄이자)
자책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요. 미움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마주했다면 자책은 멈추도록 하자. '그 때 그렇게 할 걸, 이 때 이렇게 할 걸, 이랬다면? 저랬다면?' 후회도 그만하자.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는 좀 혼나야 해요." 혼난다고 해서 힘이 생기거나 용기가 나진 않는다. 오히려 더 빼앗을 뿐이다. 자책은 신기한 녀석이라 반복할 수록 몇 배씩 커진다. 자책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나중엔 자책만 하는 나를 자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