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회복] 점심을 먹고 바로 자리로 돌아오는 일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젯밤 퇴근길,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즈음이었는데 걷는 도중에 뜬금없이 점심 메뉴가 소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지, 그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옅은 트림이 올라왔다. 점심을 먹은지 약 6시간 뒤의 일이었다.
15년동안 섭식장애와 함께 살면서 가장 귀찮았던 일은 먹고 토하는 일이었다. 아니 먹고 토하기 자체는 쉬웠는데 토하러 가기 위해 혼자 벌이는 눈치싸움이 가장 귀찮고 힘들었다. 특히 사람들과 밖에서 외식을 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타이밍을 재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디 가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며 안될텐데 어떡하지, 같이 가자 그러면 어떻게 거절하지'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은 절로 거짓말에 능해진다. 거짓말이 거짓말인 줄 모르게 될만큼 당연해진다.
중/고등학생 때는 양치하고 싶다는 말을 핑계로 급식을 먹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을 때보다 애들이 많을 때가 오히려 편했다. 시끄러우면 차라리 토할 때 소리가 들릴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하는 날엔 평소보다 빨리 토하려고 손가락을 쑤셔 넣기도 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면 의심받을까 사레 들린 척을 하곤 했다.
'소화'라는 단어 자체가 인생에 없었고 내 몸은 여전히 '소화'를 낯설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씩 '소화'를 경험할 때마다 먹먹한 기분이 든다. 누구는 무슨 점심 한끼 소화하는데 6시간이나 걸려? 라고 할 지 모르지만, 15년동안 음식을 삼키고도 식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에겐 엄청난 장족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도 배가 부른 것도 전부 신기하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구나, 일하고 있구나 알아차릴 때마다 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모두가 이 몸이 썩어 문드러질 거라고,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욕했지만 결국 살기 위해 애쓰는 건 나와 내 몸이니까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살이 찌는 것 역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섭식장애와 함께하는 동안 살기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난도질을 해댔지만 늘상 죽어있는 것 같았다. '살찌면 죽는 거야' 라고 스스로를 협박했던 과거가 우스울 정도로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달까?
몸 속 장기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로 아주 오랜 시간을 버텼다.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음식을 씹고 삼키고 기다리고 소화시키고 배변활동을 하는....인간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 이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게, 그랬던 내가 이젠 스트레칭 할 때마다 겹쳐지는 살들을 보며 웃기도 하고 트림이 올라오면 "와, 진짜 소화가 되긴 되는구나" 알아차린다.
눈치보지 않고 타이밍을 재지도 않고 사람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먹기 싫은 음식은 먹기 싫다고 이야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배가 불러도 조금 과식하며 "아....배부른데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도 완전하지 않기에 나는 지금의 내가 썩- 괜찮고 퍽- 마음에 든다.
천천히 조금씩 오늘도 내일도 맛있게 먹고 기다려줘야지. 나의 몸을!
앞으로도 계속 회복해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