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의 힘
※ 본 글은 20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 동안 진행되는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위한 글입니다
글의 마무리에 관련 링크를 올려둘 테니 꼭 다 읽고 인스타그램에 방문해 주시고, 관심 가져 주세요:)
인스타그램에 '잠수함토끼'만 쳐도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등장할 거예요!
왜 내러티브 탐구를 해요?
2021년의 저는 논문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습니다. 오로지 섭식장애와 관련한 논문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진학학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연구 주제는 확고했지만 관련해서 어떤 논문을 쓸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연구 방법부터가 문제였죠.
논문을 위한 연구는 크게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로 나뉩니다. 요즘은 혼합 연구도 많이 진행되는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양적 연구는 설문조사, 통계와 가깝고 질적 연구는 인터뷰, 이야기와 가까워요. 유튜브를 통해 제 이야기를 하면서 섭식장애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저는 자연스레 질적 연구에 마음이 갔습니다. 그중에도 연구 참여자분들의 삶과 경험을 비판단적, 비평가적으로 바라보고 담을 수 있는 내러티브 연구를 알게 되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내러티브 탐구를 하겠다!라고 선언했어요.
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왜 삶과 경험을 담고 싶었을까
이는 결국 제 경험과 이어집니다. 저는 10년 넘게 섭식장애를 앓았습니다. 그중 반 이상은 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고 알고 나서도 이 병에 대해 아는 것도, 알려진 것도 없어서 오랜 시간 혼자 방황했었어요. 집에서는 먹고 토하는 괴물이었고 밖에서는 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오랜 시간 반복되다 보니 저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잘못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즈음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어요. "나아질 수 없다. 이미 끝났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을 시키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내셨지만 정작 제가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 병에 걸린 게 무슨 자랑이냐, 그런 병은 병원에 가서도 나을 수 없다.라고 하시면서요.
죽지 못해 사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제 몸에서 토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요. 몸무게가 41-2kg를 오가는데도 허벅지가 너무 두껍게 느껴지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정신을 차리면 변기 앞이었어요. 목에서 피가 나도 칫솔을 목구멍에 욱여넣었습니다. 어차피 망한 삶이라면 이러다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누구에게도 솔직해질 수 없었어요.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고 엄마도 이해할 수 없는 저의 마음과 행동들을 타인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1년, 2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속은 이미 오래전에 시꺼멓게 타버렸고 남은 건 죽음 밖에 없으니 죽겠다고 다짐했던 나이 25살. 당시 원형탈모와 극심한 치아 통증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었던 저는 죽기 전 남기는 유언처럼 유튜브에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의 섭식장애 이야기를요. 마지막엔 멋들어지게 괜찮아진 척도 했어요. 혹시나 친구들, 가족들이 볼까 두려웠거든요. 또 한편으론 솔직히 구독자 100명도 되지 않는 채널에 이런 이야기를 올려봤자 얼마나 보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다고 해도 욕이나 달릴 텐데 그럼 영상을 내려야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 저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저도 섭식장애를 앓고 있어요. 처음 이야기해 봐요.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영상을 봤습니다. 4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악플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감사하다고, 다행이라고, 나도 여기에 있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지금도 잘 못 봅니다. 보면 눈물부터 나거든요. 저는 그저 10년 동안 먹고 토했던 저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누구는 자신을 살렸다고 했고 누구는 저를 이해한다고 했고 누구는 노력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욕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따뜻하게 다정하게 안아주었습니다. 이 영상을 올린 후 제게는 수천 명의 친구가 생겼습니다. 제 편이요.
만약 제가 영상을 올리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먹고 토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거나 정말로 제 손으로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하기 전까진 몰랐거든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고 힘들어하고 있고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고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저는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유튜브에 섭식장애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그들을 살렸다고 하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해요. 그들이 저를 살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이어주었고 살아있는 경험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무엇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남았는지 돌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 제가 찍은 영상이나 쓴 글들을 보며 스스로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그리고 나중엔 이런 경험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들에게 찾아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응원하고 싶었고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이 글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온 질문의 대답, 제가 내러티브 탐구를 하게 된 이유입니다.
섭식장애는 여전히 자극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어딘가 삐뚤어진 사람들의 병으로 여겨집니다. 아니요, 병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저 살을 빼고 싶어서 마르고 싶어서 외모 강박에 찌든 사람들의 의지박약으로 인한 ^문제^라고 말이죠. 그래서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꺼내기 보기도 전에 설 자리부터 잃습니다. 모두가, 이 사회가 세상에 네가 설 곳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내 이야기는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 궁금해하지 않아,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해
그래서 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설 곳이 필요하고 설 곳이 없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는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살릴 겁니다. 편견과 미움 그리고 증오로 가득한 시선을 잠깐 내려두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나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설 자리를 찾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렇게 한 명, 두 명, 세명 - 우리의 자리는 조금씩 넓어질 거예요.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어마어마한 용기가 말이죠. 혼자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연대가 절실합니다. 저는 제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통한 연대에서 참 많은 용기와 응원을 얻었습니다. 그런 연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분의 이야기에 힘찬 응원과 박수소리를 보내고자, 망설이는 손을 꼭 붙잡고자 장을 한번 펼쳐보려고 합니다. 준비 중에 있어요 :) 바로 2023년 제1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 행사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제가 써내려 갈 글들에 조금씩 녹여보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인스타그램을 확인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고 응원의 댓글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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