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Feb 15. 2023

[섭식장애 회복]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당장의 회복보다 중요한 것

https://youtu.be/TtckOtskpIA



도대체 어떻게 나았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먼저 불안이 올라온다. 나는 정말 나았나? 나았다고 할 수 있나? 지금 내 삶을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나 혼자 반복한다. 왜일까? 섭식장애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회복이나 완치에 대한 의견 차이가 심한 편이다. 학위 논문을 쓸 때도 a연구에선 효과적이었던 치료법이 b연구에선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거나, 한 연구 안에서도 치료법에 대한 결과가 나뉘는 등의 선행 연구가 많았다. 그 때 생각했다. 우리는 참 어려운 길을 걷고 있구나.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인증을 받거나 증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나았다고 하면 나은 건데 여전히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고 체중 강박을 갖고 살면서 '저는 이제 괜찮아요.' 라고 말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속이고자 한다면 나는 평생 남들을 속이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기엔 일찍이 가족들에게 들켰지만, 가족은 같이 사니까 들키기 쉽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거짓으로 회복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수 없이 많은 재발을 경험했고 여전히 폭식이나 구토의 충동에 휘청인다.


예전과 다른 내 몸을 보면 불안하기도 하고 개인PT를 받으며 뭐라도 해야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게 정말 나은거예요?" 라고 묻겠지? 그리 묻는다면, 나는 확실하게 답하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진 않다고. 예전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한다라는 걸 깨닫기 전에 이미 변기 앞에 있었을 거고 새벽 3시든 4시든 밖으로 나가 칼로리를 소모하겠다며 뛰어 다녔을 거다. 나는 더 이상 그 생각이나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모르겠다. 정답은 없다. 나는 긴 시간 노력했고 그보다 더 자주 그리고 심하게 좌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의 길을 걸었다는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이런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약을 먹으면 낫고 상담을 받으면 즉각적인 변화가 생기고 입원을 하면 빠르게 회복하는 그런 '단 하나의 판타지'가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회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에게 섭식장애를 들킨 뒤, 한동안 어마어마한 감시에 시달렸다. 엄마는 볼 일을 볼 때도 문을 열어 놓으라고 했고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변기와 세면대를 점검했다. 왜 세면대까지 점검했냐고? 엄마가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내가 변기물을 내리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욕조를 밟고 선 상태로 상체를 숙여 세면대에 토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기이한 행동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주 긴 시간 직접 그런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나의 모든 행동이 기이하다. 동시에 사무치게 슬프기도 하고.


엄마는 내가 그만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지만, 어떻게 도와야 하는 지 몰랐다. 알려 줄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나도 몰랐다. 제일 몰랐다. 오히려 그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답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하면 그만 둘 거냐고 울며 불며 소리쳐도 답할 수 없었다. 나한테 답은 이건데, 유일한 답인데 다른 걸 생각하라니?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면 될텐데 왜 나한테 이러나....싶었다. 물었으면서 대답을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아마 엄마도 너무 불안했겠지, 딸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그 병이 소위 말하는 '정신병자'들이 걸리는 병 같으니까, 어렴풋이 자신과 남편의 책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격하게 반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이 필요했다. 낫고 싶다고 말하면서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고 어떤 때는 굶는 것으론 부족해 한 끼도 먹지 않고 작은 초코바 하나 들고 등산을 하며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이 뭐 같은 모순을 함께 버텨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되어 주어야 했지만 10년 넘게 이 병과 함께 하면서 나는 이미 방향을 잃은 지 오래니까 '회복'으로 가는 방향키를 꽉 붙잡고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들 내게 "왜 그러는 거야?" 라고 물었지만 내가 답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망설이면 망설인다고 뭐라 했고 용기 내 낫고 싶다고 말하면 "낫고 싶은 애가 그러면 안되지" 라고 나무랐다. 나의 희망을 짓밟았다. 그냥 그렇게 먹고 토하다 죽으라고 나와 같이 말했다.


한때는 가족들에게서 받지 못한 이해를 연인을 통해 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칭했고 엄마와 마찬가지로 내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토했어?" 라고 물었다. 섭식장애를 가졌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섭식장애가 되었다. 그건 너무나도 강렬하고 커다란 병이자 나였다.


너무 커서 진짜 나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병은 아주 빠르게 나라는 사람의 '정의'가 되었고 사람들은 '섭식장애'를 통해 나를 봤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섭식장애와 연결시켰고 낫고 싶다고 하면 비웃었다. 정말 낫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들었던 말들 중 가장 폭력적이었다. 무력한 사람으로 만들기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주 오래 오래 부정하고 부정당하며 살았다. 낫고 싶다고 말하면 당장 내일부터 나아야 할 것 같아서 언제부턴가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를 포기했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멈췄다.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려요. 계속 실패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낫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 말을 믿어요.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 연락을 준 이들에게 매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긴 시간 혼자 이 병과 이별하면서 가장 필요했던 응원이자 기다림. 당장 회복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도, 여전히 변기 앞에서 눈을 뜬다 해도 묵묵히 나를 믿어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사람. 삶을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회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덜 비참하고 싶어서였다. 실패하고 재발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그게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기를 써서 다시 회복의 길로 돌아갔다. 언젠가 꼭 말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당신들이 비웃고 무시해도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이 삶은 온전히 나와 많지는 않지만 병과 상관없이 곁에 있어준 이들의 노력과 기다림, 애정을 통해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설령 다시 토한다고 해도, 변기를 붙잡고 우는 날이 온다고 해도 절대 스스로를 버리지 않겠다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의 회복은 나로부터 시작해 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섭식장애 인식주간]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