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언제나처럼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분명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다거나, 못했다거나 그렿지도 않았다. 회사에서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긁어 모아 다 쓰고 나왔다.
"피곤하다. 너무 피곤해. 힘들어."
요즘은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산다. 달고 사는 걸 넘어서서 입만 열명 자동적으로 힘들다, 피곤하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본인은 열심히 하고 싶은데 나의 말이 사기를 저하시킬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신경써서 입막음을 하거나 아주 작게 말해야지 했는데 바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겐 안들릴 수가 없겠지. 그럼 그들은 또 나를 걱정하며 간식이나 비타민 음료등을 챙겨준다. 감사하지만 나의 무기력은 '잠깐' 혹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아침에 일어나 머리 감는 일조차 버거워서 침대에 늘어져 있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 앞머리만 살짝 적시고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돌아오면 화장을 지울 새도 없이 입었던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거의 맨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나도 모르는 새 곯아떨어졌다 새벽 2시즈음 눈을 떠 어기적 어기적 냉장고를 열어 먹을 만한 것을 찾는다. 장도 제대로 안 봐둬서 먹을 게 없다. 배달 어플을 켜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뒤적인다. 예를 들어 떡볶이나 짜글이 같은 메뉴,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어차피 토하고 싶어질 거면서 왜 이러고 있나 싶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없이 입에 음식을 넣고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행위일까? 무기력하다면서 배가 고픈 걸 보면 아직 덜 힘들구나 - 스스로를 깎아 내린다. 사람들과의 연락도 귀찮다. 나의 오랜 이슈인 '단절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해진다. 일을 하는 중에는 가면을 쓴 것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게 응대하지만 사적인 영역으로 돌아오면 어플 알람을 다 꺼버리고 작은 집, 좁은 방, 침대 위에서만 살아있다.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험도 쳐야 하고 다른 준비 과정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하고 싶지 않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 모르겠다. 대외적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과정이고 필수 요소이기 때문에 하고 싶든 안 하고 싶든 결국 해야한다. 할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한, 더는 미룰 수 없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까 해야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닌데 조금씩 조금씩 하면 안돼? 답답한 마음에 짜증도 나고 화도 난다.
'내적 동기'라는 말이 있다.
그와 반대로 '외적 동기'라는 말도 있다. 요즘은 동기부여도 사고 파는 세상이라고 하는데 주로 그렇게 거래되는 동기는 '외적 동기'라고 부른다. 내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닌 이미 피어난 바깥의 것을 옮겨 심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갓생살기, 미라클 모닝과 같은 키워드를 검색하면 외적 동기부여를 위한 콘텐츠는 흘러 넘친다. 흐르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사람을 잡아 먹을 듯이 몰아친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저렇게 되고 싶다' 와 같은 생각들이 동기(動機)라는 이름을 달고 내 안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지만 금새 시들어버린다.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생명을 잃는다.
'외적 동기부여'는 겉핧기에 불과하다.
무기력과 안녕하려면 '내적 동기'를 찾아야 한다. 만들어야 한다. 근데 이게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고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뚝!딱! 하고 생기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내 속을 뒤집어 까봐도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 라는 말만 둥둥 떠다닌다. 나는 왜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걸까? 사실 내 하루를 들여다 보면 아무것도 안하는 날은 잘 없다. 특히 근래 1-2개월은 정말 바쁘게 지냈다. 주말마다 서울, 천안, 순천을 오가며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준비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모든 걸 다 던져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내가 너무 별로였다.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몸만 죽어라 바쁜 느낌이랄까? 거기에 존재하는 나 자신이 볼품없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갖추기 위해선 미뤄둔 일들을 해야한다. '해야한다'라고 여겨지는 일들, 그게 아무리 대외적인 일들이라고 해도 결국 나의 커리어나 성장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대로 시간이 흘러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이런 엄격한 생각들이 무기력의 늪에서 더더욱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겠지. 그냥 한다, 남자친구가 자주 하는 말인데 정말 '그냥'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의 무기력은 두려움과 불안에서 시작된 것임을....알고 있다.
잘 해내지 못할까봐, 실패할까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까봐,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들이 어떻게 보여질까 두려워서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건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결과와 그 결과에 따른 평가, 시선, 상황들을 생각한다. 그 생각들을 하는 것만으로 너무 지친다. 마치 그 일들을 다 경험한 것처럼 말야. 그래서 무기력해진다. 그렇게 될거라면 하지 말자고, 못하겠다고.
감당할 수 없어진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버겁게 느껴지고 지금 당장 눈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든 해치우기 위해 억지로 힘을 낸다. 힘을 낸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인것처럼 행동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렇게 업무를 끝내고 나면 정말 녹초가 되고 보상심리가 마구마구 샘솟아 음식을 해먹기보다는 시켜 먹는다. 샐러드나 건강한 메뉴를 먹으면 차라리 덜한데 염분이 가득한 음식을 먹으니 몸이 엄청 무거워지고 어느새 또 침대 위에 늘어져 있다. 무기력의 악순환은 정말 무섭다. 이 글을 쓰다보니 그럼 대체 뭐부터 해야할까 싶다. 마음을 크게 먹고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하면 금방 지칠 게 뻔하니까 아주 작은 것부터 고쳐갔으면 좋겠는데....무기력과 일심동체인 지금은 "이거다!" 싶은 게 없다.
그래도 나의 무기력이 불안과 두려움에 왔다는 걸, 엄격하게 굴면 굴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는 점에서 글쓰기를 후회하지 않는다. 외적 동기가 비교로 이어지는 요즘, 잠시 외부 소리를 차단하고 나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난 왜 저만큼 하지 못할까, 왜 저렇게 될 수 없을까 등등 답이 없는 질문은 그만해야지. 그만하려면 그만 봐야겠고. 불안과 두려움을 탓하거나 혼내지말고 알아주는 것부터. 인정하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니가 그래서 그렇지~ 와 같은 지적질을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잖아.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