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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Mar 12. 2018

섭식장애 극복하기#2 사실은 내가 널 붙잡았어.

우리 조금 느려도 완전히 안녕하자.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열 여섯의 소녀는 스물 일곱이 되었다.
많이 아팠고 힘들었고 무너졌고 결국엔 다시 일어나 지금을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본인이 본인에게 ㅋㅋㅋㅋㅋ)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기 비하가 있었는 지, 누가 알까?

20대 초반,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말하는 친구와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네가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가끔은 네가 그런 너 자신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
"맞아. 나 솔직히 이거 아니면 나한테 남는 게 뭐가 있나.. 싶어"


나는 나를 싫어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자기 연민이 심한 사람이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그리고 왕따 생활을 거쳐 어른이란 타이틀을 얻었고 
사회가 바라는 점수나 스펙으론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나에게 남은 건 그 모든 과거를 이겨내고 지금을 살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심한 자기연민과 피해망상을 앓았다.
누군가 차갑게 이야기하면 더 날선 말투로 상대방을 쏘아 붙였다.

"너 칼 든 아빠랑 마주해서 싸워본 적 있어? 모르는 남자가 엘레베이터에서 네 옷에 손을 넣고.."

그러다 혼자 울어 버렸다. 상대방은 곤란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미안하다며 나를 달랬다.
언젠가 블로그에 "나는 동정받는 법을 알아" 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쭉 그런 상태였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겉으론 누구보다 상냥하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타인보다 나를 위한 방어벽이었다.
그리고 그 방어벽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던 건 폭토였다.
내가 아프고 힘들다는 증거.
죽지 못해 산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였다.
그래서 놓지 못했다.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불쌍한 이유라도 만들어야 했다.
폭토에서 멀어지려면 당연히 내 과거를 놓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나를 꽁꽁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울타리와 벽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문도 만들어야 했고.
그러나 쉽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 없었다. 그리고 경쟁 사회라 불리는 크고 넓은 사회에 발 딛이고 싶지 않았다.
질 게임에 도전할 용기따위 내게 있을리 만무했으니.

그랬던 내가 왜 이 병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이유는 많다. 건강이 가장 큰 이유였다.
폭토를 해 본 경험이 있거나,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살이 빠지다가 시간이 흐르면 점점 붓기 시작한다.
흔히들 말하는 침샘이 부으면서 턱이 이상한 형태로 변해가고 
눈, 손, 발, 복부 팽창 등 온 몸에 독소가 쌓인다.
눈의 핏줄이 곧잘 터지고 생리통은 심해지고 그러다 생리가 멈춘다.
짧게는 1달 길게는 1년 넘게 생리가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치아 부식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부도 독소 때문에 뒤집어 진다.
제대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니 자는 것도 일이다. 불면증은 심해져만 갔고 나의 생활은 피폐했다.
처음엔 이러다 죽자 싶었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걸로 그만일 인생인데 뭐하러 애를 쓰나 싶었다.
그러다 그 친구를 만난다. 내 인생의 전부를 부정하고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건지기를 반복했던 사람.

폭토를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은 본인이 자신을 제어하고 있다라는 생각인데
먹는 것을 제한하고 운동을 하면서 *강박적인 운동*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가 조절하고 있다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음식과 체중(운동)에 끌려 다니는 셈이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으면 관리라는 말이라도 붙일텐데 
스스로 멈출 수 없는 행위를 누가 자가 조절이라 하겠나.
여하튼 그 사실을 모른 채, 악화되어가는 건강과 함께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 연애는 내 인생 최악의 연애라고 불러도 부족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아주 큰 과정이었다.
내 인생을 내가 무시하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 지 배웠다.

앞서 말했듯이 나 역시 자기 조절을 하고 있다 믿었고 
과거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앞으로의 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를 놓지 못하고 늘상 불쌍한 내 인생~ 하며 살았다.
누군가 인정해 줄 거라며, 언젠가 이런 나의 불쌍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짠하고 나타나 
내 인생을 구원해주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상상도 했다.
그 친구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2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그 친구를 만나며 나는 내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부정 당했다.

엄마가 한 쪽 청각을 잃고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동생이 심한 혼란과 우울의 시기를 겪고
우리 집이 개판이 된 모든 이유가 우리의 선택이였다고 말하는 곳에 내 발로 기어 들어갔다.
그 선택을 되돌리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과거를 지우고 
신 앞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는 놀라울 만큼 모순적인 곳으로.

과거를 놓고 싶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 죄를 뉘우치고 
상처 받은 사람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버린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역시나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미치도록 혼란스러웠고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의심스럽고 불안했다.
내가 걸어온 과거는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의미여야할까
거기에 정답은 있을까?

아니. 없다.
그건 나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들의 말대로 스스로 내 인생을 더럽히고 망가뜨리고 
내 인생의 시작부터가 죄이니 그걸 사죄하고 뉘우치며 살아가는 게 나의 선택인가.
아니다. 
내 인생은 힘들었지만 결코 더럽지 않았다.
내 인생은 어려웠지만 결코 망가지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내 인생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은 나였다. 
잘 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을 뿐인데 

나는 어디로 와버린 거야?
이대로 정말 죽어도 후회없어?
네 인생의 끝에 '폭토' 그 두글자만 남아도 아무 상관없어?
죽고 나서 가족과 친구들, 너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폭토를 이겨 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러다 결국 사이비 종교에 들어가 
삶을 마감한 이진솔로 남고 싶어?

단지 방법을 몰랐잖아.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잖아.

그 날로 나는 그 곳을 나왔다.
나를 여자친구가 아닌 전도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했다던 사람에게서 
완벽히 뒤돌아섰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나 쉽게 나를 이용할 수 있고 
내 삶을 이용할 수 있고
내 인생을 모욕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친했던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자기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내 이야기를 떠벌리며 
"너무 불쌍하지 않아? 나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하며 
(ㅋㅋㅋ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내 이야기를 그저 한낱 동정 거리로 만들었다. 
그때는 그 친구와 연락을 끊고 말았지만 
이번엔 그보다 훨씬 모욕적이고 화가 났다.
(이런 단어로도 부족해. 아 뭔가 고급스러우면서 찰진 욕없나?)

지켜야 한다.
내 과거를 온전히 지키려면 더럽히지 않으려면 
내가 강해져야 하고 단단해져야함을 깨달았다.
그러려면 나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고 고민해야 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하기 싫고 
하고 싶은 일을 실제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지까지.

나는 여전히 고민하는 중이다.
정답은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선택이 틀릴 수도 있고 더 힘든 과정으로 이어질 지도 모르지만 
남의 손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훠-얼씬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폭토와 안녕하는 일이었고 
폭토와 안녕하기 위해선 과거의 나를 놓아야 했다.
과거가 아니더라도 나를 나타낼 수 있는 나다움을 찾아야 했고 
지금은 그 과정 중에 있다.
아마 삶의 대부분은 그 과정들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싶다.

열심히 살았다.
참 열심히 버텼다.
잘 살아냈다.
잘했다.
이제 행복하자.
나를 위해, 나에 의한, 나의 삶을 살자.

나에겐 그 모든 시간을 견뎌낸 끈기가 있고 근성이 있다.
사실 누구보다 내가 내 삶을 가장 사랑한다.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여진다고 해서 모두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며 
모두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삶은 가장 중요한 당신의 기준을 무시하고 있다.
기준이 없다면 세우면 되고 
세우는 과정에서 우린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고시원 그리고 짧은 일본생활을 하며 배운 건 
삶에도 비움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를 위한 자리가 필요하고 
그 자리를 위해선 오래된 것을 비워내야 한다.
비워낸다고 해서 결코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도 우리의 선택이니 
당신은 당신의 과거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은가?

나는 나의 과거에
진부하기 짝이 없는 "발판"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가장 아래에서 언제나 나의 미래를 누구보다 단단히 지탱해주고 있을 그 시간들을 
결코 잊지도 무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갇혀 우리가 가진 무궁 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포기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충분하고 아름답고 가치롭다.
그 모든 건 타인에 의해서 셈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된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널 붙잡고 있었다.
네가 나를 지켜준다고 착각했고 
내 인생에 너를 빼고 내 과거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두려워
내 삶을 죽음으로 몰았다.
언젠가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내게 죽음이라는 선택권이 남아있는 순간까진
내가 그 형태를 택하고 싶다. 
적어도 폭토와 과거의 불행만으로 인생을 채운 채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다.

너는 너무도 크고 강하고 뚜렷한 존재라
네 잔상들이 여전히 내 생활 크고 작은 곳에 남아있지만
내 손으로 너를 붙잡진 않을 것이다.
나는 자주 우울하고 슬픈 사람이지만 
그 모습도 내가 가진 많은 모습 중 하나라 인정하고 살아가고 싶다.
어떤 날은 무척 행복하기도 하며 
이 삶을 살아서 다행이다 싶은 때도 반드시 존재하니까.
우리 천천히 그리고 완벽하게 안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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