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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Feb 12. 2018

섭식장애 극복하기 #1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이건 마음의 문제였다.


거울 속 내가 너무나 밉고 보잘 것 없어 보였다. 꼴보기 싫었고 그래서 거울이 싫었다.
예쁜 몸이 어떤 몸인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었지만 내 몸은 예쁘지 않았다.
못났고 역겨웠다. 
내 몸만 싫었던 게 아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무얼 하든 싫었다.
무얼 하든 실패할 것 같았고 무얼 하든 불행할 것 같았다.
심지어 실제로 그랬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늘 허덕였고 꾸역 꾸역 살았다. 

그런 마음이 식이장애를 내게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토하고 싶지 않았다.
토를 하고 나면 눈이 빨겋게 충혈되고 턱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식도는 따가웠고 종종 경련이 일어났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덜덜덜 떨렸다. 괴로웠다. 이게 삶이라면 누군가 멈춰주었으면 싶었다.
죽기는 무서우니까 살아야 했고 나는 토를 멈추고 싶었다.
억지로 꾹꾹 참았다.
어떤 날은 토하는 게 무서워서 한끼도 먹지 않았고 
어떤 날은 다 싫어져서 미친듯이 먹고 토해댔다. 정말 미친듯이.

고치고 싶었지만 고칠 수 없었다.
행동을 멈춘다고 해서 완전한 극복에 도달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마음의 문제였다. 내 마음과 내 의지와 내 삶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나라면 만족할 수 있을까? 나에게 만족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없었다.
40이든 50이든, 체중계가 어떤 숫자를 가리키고 있든 상관없었다.
난 그냥 내가 싫었다.
살을 뺀다고 해서 내가 예뻐 보이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살이 빠지니 예쁘다, 훨씬 좋아 보인다, 라고 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변기 앞에 널부러진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과 한심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만족이 없는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잘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낸 나
내일을 살아낼 나 
모든 과거를 살아온 나
난 그런 나에게 열심히 했다. 잘했다. 장하다. 대견하다.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다.
줄곧 혼내고 화내고 자학만 해댔다.

토를 해서 살을 빼도 내가 예뻐 보이거나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 좀 쪄라, 밥 좀 먹어라, 스스로를 챙겨라 라고 말하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더 더 말라야 하고 더 더 더 아파야 했다.
친구에게 폭토하는 걸 들켰을 때 친구는 말했다.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너는 네가 안 소중해? 나는 네가 소중해. 
남인 나도 네가 이렇게 소중한데 너는 왜 네 자신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나에게 물었다.
나는 뭘 잘못했을까?
누군가가 답했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내가 널 왜 낳았을까"


엄마는 화가 나면 늘 내 탓을 했다.
아빠도 내 탓을 했다.
할머니도 고모도 다 내 탓을 했다.
다 내 탓이었다.
난 괜히 태어났다.
태어났지만 잘하는 것도 없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지도 못했다.
늘 말썽만 부리고 고집만 부리는 문제아였다.
어느 날부턴가 "내가 사라진다면? 내가 없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먹는 것도 죄스러워 먹은 걸 다 토해냈다.
엄마 아빠 앞에선 꾸역 꾸역 미친듯이 먹어대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모든 걸 게워냈다.
일종의 벌이었다.
태어난 죄에 대한 벌
태어났으나 무엇도 해내지 못한 죄에 대한 벌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곧 나의 시선이 되었다.
나는 공부도 못하고 예쁘지도 않고 재능도 없는 세상에 내어놔도 무용지물인 인간이었으니까.
그 시선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 지 몰랐다.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막막했다. 껌껌했다. 무서웠다.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해?
나를 좋아하려면 어떻게 해야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 하나 하나씩 내가 노력한 일들을 적는 일이었다.
창피하고 화나고 속상한 일만 적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한 일들 
내가 노력했던 일들 성패에 상관없이 다 적어봤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해 혼자 칭찬했다.
나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잘했어
충분해
대단해
대견해
멋져
자랑스러워


지금 중얼거려도 눈물이 차오르는 그 말들을 혼자 얼마나 되뇌었는 지 모른다.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잘못한 일들만 가득했던 내 삶에 칭찬을 해주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보고 싶어서 일본 내 고등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일
영어 연극부 동아리에 들어가 영어로 된 대본을 외우고 무대에 오른 일(실수도 많았지만 ㅎㅎ)
수학 하반에서 중간반으로 올라간 일 등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이라도 칭찬했다.
잘했다고
열심히 했다고 
그런 네가 나는 참 좋다고 말했다.


삶의 문제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살 찌기는 싫고 운동 하기는 더 싫으니까 토하는 거라고 
나약하고 게으르고 한심한 인간들이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살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살 문제가 해결 되면 다 해결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건 살이 찌고 빠지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 이상의 문제다.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차가운 말들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더더 가라앉게 만든다.
더더 도망가게 만든다.
영영 회복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부끄러운 마음에 지금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고 몰아 세우기 바쁘다.

무너지는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내가 깨닫지 않으면 
내가 알아주지 않으면
식이장애는, 폭토는 절대 우리를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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