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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ietto Nov 02. 2021

아이는 갖지 않을래

생각은 변하라고 있는 것

아마도 그 시기 쯤 인 것 같다. 패션 매거진에 등장하는 그 어떤 모델 보다 화려하고 빛났던 언니가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 한 게. 보기 좋게 슬림했던 몸매는 점점 앙상해져갔고 늘 옷장에 가득했던 희귀템은 진짜 보기 힘든 희귀템으로만 고이 간직되었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부스스한 머리, 가끔은 양치도 샤워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은 야생의 모습.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서야 한숨을 돌리며 화장실을 사용했고 눈을 뜨고 처음으로 어른과의 대화란걸 할 수 있다고 했다.


삼남매로 자란 나는 늘 결혼하면 아이는 셋 이상을 낳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전에 살던 집에 문제가 생기며 언니네 집에 몇달만 살 생각으로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아이에 대한 생각이 싹 바뀌었다.


슬프게도 자라나는 조카를 보며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않은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이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어렵고 귀하게 얻은 아이였다. 반면에 한 없이 까다롭고 별난 아이였다. 신생아로 누워있을 땐 등 센서로 바닥에만 닿으면 바로 스위치가 켜지는 경이로운 일 들의 연속이었고 덕분에 언니는 늘 조카를 업거나 밤에는 배 위에 올려 놓고 자야했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수면욕을 송두리째 뺏어가는 대단한 저 어린 아이. 이유식을 시작한 뒤로는 더했다. 입이 짧았던 건지 이유식이 제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건지 식사 시간은 전쟁이었다. 마치 프랑스의 저녁 식사 시간을 연상케 하는 2-3시간은 기본이었고, 거기에는 우아함은 싹 빠진 살벌함 만이 존재했다. 먹지 않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치는 아이와 기어코 먹이겠다고 수저를 입에 우겨 넣는 엄마와의 전쟁. 하루에 3번 되풀이 되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겨우 먹여 놓으면 심기가 뒤틀린 조카는 이내 모두 토 하고 말았다. 곧 이어 들려오는 절규. 내가 본 육아는 이랬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10%이라면 아이로 인해 고통 받는 순간이 90%이었다. 결국 언니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외과를 찾았고 전두엽에 약간의 손상이 왔다고 한다. 귀여운 조카가 점점 작은 괴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기 시작하면서 조카의 육아는 눈에 띄게 편해졌고 지금은 누구보다  할일 척척 알아서 잘하는 6학년이 되었지만 언니가 육아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본 나는 아이보다는  인생을  소중히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32살에 결혼을 했고 결혼 한지 반년 만에 갑상선 유두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를 받고 나니 1년이 지나 있었다. 아이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본 잡다한 의학 지식 때문에 임신  널뛰기  갑상선 호르몬 수치에  몸이 힘들어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뒤에도 황반변성, 하지정맥류 수술 등등 작은 이벤트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을 핑계로 나는 임신을 미루고 미뤘다.


결혼을 하고 5년째가 되던 해, 그리고 갑상선암 수술 후 4년째가 되던 해 몹쓸 암이 다시 재발했다. 다행히 수술 일정이 빨리 잡혔고 수술도 무사히 잘 끝났다. 회복에 전념 중이었던 내게 남편이 넌즈시 말을 건넸다.


"우리 난임 병원에 한 번 가보는게 어때? 검사라도 받아보자"


 그냥   건넨 말이었는데  말이  그렇게 배려심 없고 서럽게 느껴지던지 펑펑 울다 끝내는  말도 다하지 못하고 각자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나의 격한 반응 속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보다는 '과연 내가 아이를 가질  있을까?' 대한 두려움이 다. 두번의  수술을 받고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도 받은 내가 거기에 이렇다 저렇다  작은 질병들 까지....허약하고 보잘  없는 몸뚱아리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너무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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