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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Jan 17. 2021

일상 속 '작은 구원'

대가 없이 타자에게 수용되고 용납되는 경험, 현대인을 위한 구원

1. 응답하라 1988 속 택이와 덕선:

우리는 자기 소외를 벗어나 타자에게 수용되기를 갈구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 한 장면

'응답하라 1988'에서 프로바둑기사 역할로 나오는 '택'이 소꿉친구인 '덕선'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는 마냥 '어리광'으로 넘기기 어려운 '자기 소외 극복'과 '타자 인정에의 강한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택은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승부욕이 강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만큼은 덕선에게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드러낸다. 평소에 그는 절대로 승부에서 지지 않으려 한다. 아니, 지지 않아야만 한다.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과 그간의 경력부터가 '패배자 최택'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응원하던 이들의 실망도 두려울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고. '승부사 최택'과 '그냥 최택'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런 택이 덕선에게 묻는다. "경기에서 져도 되냐"라고. 이제 이 질문은 가벼운 어리광으로 읽힐 수 없다. 강한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망은 자신이 '승부사 최택'이 아니라 '그냥 최택'이어도 괜찮겠냐는, 자기 소외 극복을 향한 외침이며 동시에 그 극복의 조건인 사랑인정을 갈구하는 인간적 소망이다. 자신이 패배자여도 수용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덕선은 '당연하다'고 대답한다. 그제야 택은 미소를 띤다. 그의 존재가 승패와 무관하게 사랑해줄 수 있는 이에게 거둬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소외되었던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2. 이들의 대화가 담은 메시지:

일상을 사는 우리는 구원을 갈망한다


이 대화는 지위 불안, 그리고 인정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의 감수성을 사로잡는다.


 '경쟁 속 홀로 살아남기'는 우리 시대의 당연한 생존 방식이 되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책임져주거나 내 실패를 수용해 줄 수 없다는 잔인한 격률 아래에서, 우리는 아찔한 미끄럼틀에 매달려 있다. 세상은 발을 지탱할 받침대라도 있는 사다리가 아니라, 손톱이 빠져라 매달리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미끄럼틀'이다. 마가릿 대처의 말마따나 각자도생 바깥에 다른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미끄럼틀에서 떨어지는 건 자신을 수용해주고 거둬줄 이가 없는 이에게 실패란 '사회적 자살'이다. 그렇게 버티고 또 버텨도, 힘들고 공허할 뿐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내 삶의 가치가 채워질 거라던 이 사회의 약속은 이미 나를 배반한 지 오래다. 채워도 채워도 배부르지 않으며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현대화된 가난(Illich)만이 남아있다.


손을 내밀어 주는 일상 속 구원자.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안아주듯 말을 건넨다면 어떨까.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너를 믿고 사랑한다'고. 잠시나마 불안을 잊고 평안을 누릴 것이다. 그의 구원에 힘 입어 그가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이제는 미끄럼틀 아래로 떨어진다고 한들, 내 삶이 가치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나'에 의해 소외되었던 '안전히 사랑받고 싶은 나'가 서서히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 두 자아상 사이의 갈등이 해소된다. 타자의 인정과 포용 덕분에 말이다.


탁월하지 않아도, 자격이 없어도, 그런 우리를 수용해주고 인정하는 이와 동행하는 이런 경험. 그래서 잠시나마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존재로 거듭나는 경험. 소중한 타자와 자신이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경험. 이것이 곧 현대인이 바라마지 않는 '일상 속 작은 구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구원이라는 말은 특유의 종교적 색채와 수동적인 뉘앙스 때문인지 오늘날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된 모양이다. 그러나 어떤 자격이나 대가가 없더라도 타자에게 내가 의미 있게 수용되는 경험을, 이만큼 잘 표현해줄 다른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너무나 가벼이 쓰이는 '인정'보다 더 진하고 끈끈하며, 성애와 거진 동의어가 되어버린 '사랑'보다 더 깊은 자비로움(splanchnizomai)이 담긴 이 말을 대체할 단어가 있을까. 오히려 구원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 빛바랜 단어들이 비로소 새 생명과 호흡을 얻는 건 아닐까.


물론, 지금 필요한 건 구원의 윤리가 아니라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그런 목소리에 이끌릴 때가 자주 있다. 단칸방에서 나를 인정해주는 공동체와 오순도순 사는 것보다는 그럴듯한 저택에서 홀로 우는 게 승리자라는 메시지는 분명 우리 주변에 편재해 있다.


그러다가도 문득, 내가 패자인지 승자인지와는 무관하게 나를 안전하게 거둬주는 공동체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인정 투쟁, 그리고 지위 불안으로 점철된 우리의 삶은 타자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 그래도 잘 살았지?' '내가 많이 부족했는데, 그래도 내가 괜찮아?'라는 질문 말이다. 그 응답으로 따뜻한 위로와 포옹이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자격도 없이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버선발로 뛰어나가 꼭 껴안고 그를 축복했다는 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화가 렘브란트는 생애 끝에 다다라 자신의 지난 삶을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는 마치 삶의 구원을 이제야 찾았노라고 고백이라도 하듯이, 더 이상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도 인생 가운데 그런 만남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원 출처: https://blog.naver.com/ehrqkd1234/22219595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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