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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삶이다

더블린 하르코트 호텔

by 김상

https://youtu.be/KxYwat21N9Y

"Fucking Chinese"

"Yellow"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어"


내가 더블린에서 거리를 지나가다가 1주일에 한번은 들었던 인종차별적인 언어, 한국으로 부터 "8880Km" 떨어진 더블린에서 나의 영혼은 끝내 무릎을 꿇고 도망가기에 이른다.


더블린에서 처음지냈던 숙소근처의 풍경과 근처 공원

더블린으로...


19년 5월 부푼꿈을 안고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공항 입국심사대에 섰다. 직원은 나에게 행운을 빈다며 입국을 축하해주었다. 더블린 국제공항을 나와서 한국과는 다르게 매섭지는 않지만 시큰한 추위를 느끼며 나의 더블린에서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나기전 명동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모은 400만원으로는 2달 정도 버틸수 있는 금액이였는데 그럼에도 나는 너무나 불안해서 도착하자 마자 일자리를 구하러 City Centre 곳곳을 돌아다녔다. Curriculum Vitae(이력서)를 들고 30여곳의 레스토랑을 돌아다녔는데 그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Kokoro Sushi Bento라는 스시 및 아시아푸드 벤토 전문점이였다. 아무래도 일본 음식점이다 보니 대부분 홍콩,일본,한국인 직원이였고 왜 나를 채용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스시 가게이니 일본인과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1달가량 일을 했는데 Roaster에서 보이듯이 풀타임이 아니라 파트타임이 대부분인 고용 환경이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월급으로는 Rent 비용을 내면 나에게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풀타임 잡을 찾게되었고 이곳이 바로 앞으로 이야기할 더블린 시내에 있는 3성급 호텔인 Harcourt Hotel 의 주방이다.

개별포장하여 판매하는 스시와 근무표 (James는 나의 영어이름이다)

Harcourt Hotel의 키친포터


Kitchen Porter는 설거지 및 주방의 청결관리, 물품정리와 같은 일을하는 직업이다. Harcourt Hotel은 지하의 메인주방과 2층의 바베큐 주방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메인주방의 경우 아침,점심,저녁의 호텔식 정찬요리를 담당했고 바베큐 주방은 저녁에만 문을 열었는데 피자나 햄버거,스큐어,소시지,스테이크를 담당했다.


나는 주로 2층 바베큐 주방에 배치되어 그릇닦기와 감자튀기기, 마무리 정리를 했는데 한창 피크인 오후 7~8시에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릇과 식기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업으로서 설거지는 처음이였고 이렇게 바쁜 일인지는 예상도 못했었다. 하지만 중국인 수쉐프와 루마니아 출신 미하엘 쉐프는 자기가 직접 빠르게 설겆이 하는 노하우를 몇번 씩이나 보여줬고 점차 내 설거지 스킬은 일취월장하여 이들 쉐프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까지 속도가 붙게 되었다.


2층 바베큐 주방에서는 설거지뿐만 아니라 두대의 튀김기로 쉬지 않고 감자를 튀겨내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고 쉐프에게 냉장고에서 스큐어,스테이크,햄버거 패티등 식재료를 적절한 시간에 빠르게 운반하는 역활도 중요했다. 손님이 많을때는 짧은 시간도 매우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일이 익숙해지고 나니 몸이 춤을 추듯 이 모든일을 부드럽고 빠르게 처리할수가 있었고 리듬감을 느낄수 있었다.


나의 근무시간은 주5일, 8시간~10시간으로 로스터가 짜여졌었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적응하고 익숙해지니 이 힘듦을 잊을 수 있었다. 꼬박 꼬박 들어오는 월급과 익숙해진 업무환경에 나의 마음은 안정기로 접어들어갔다.


2층 바베큐 주방 및 식재료와 냉동창고

난 중국인이 아니야!


내 더블린 생활은 낯선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벌며 생계를 혼자의 힘으로 꾸려간다는것에서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는데 시내를 걸어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친절해 보였고, 호텔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3개월이 되던날 아일랜드인 호텔 직원(시설관리를 하는 직원이였다)이 내 뒤에서 말했다.


"Fucking Chinese"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내가 서있는 장소에는 나와 그 아일랜드인밖에는 없었고 나를 향해 욕하는게 분명했다. 나는 모른척하고 일단 자리를 피했다. 그 사건 이후에는 악귀가 따라붙듯 길거리를 지나갈때도 일주일에 몇번씩이나 동양인을 비하하는 언어를 듣곤 했다. 차별적 욕을 지속적으로 듣다보니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간 느꼈던 자신감도 어느새 눈녹듯 사라졌다. 허리라도 꼿꼿이 펴고 길을 다니면 괜찮지 않을까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녀도 악귀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전 부터 나를 괴롭혀오던 아일랜드 호텔 직원도 그 이후로 몇번씩이나 인종차별적 욕을 뒤에서 지껄인다. 이때부터 나는 맞서 싸울 것이냐, 아니면 도망갈것인가를 고민했었던것 같다. 몇일 뒤 접시를 주방에서 손님에게 서빙해주는 아일랜드인 서버가 내 뒤에서 다시금 애기한다.


"Fucking Chinese"


이 말을 듣고 참아왔던 나의 인내심은 터져버렸다. 왜 뒤에서 당신이랑 아무 연관도 없는 나에게 이러는 것인가?

너무나 화가나서 헤드쉐프와 수쉐프에게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애기했다. 서양에서는 인종차별 이슈가 큰 이슈인지 모르겠지만 다음날 서버는 내게 찾아왔다. 많은 주방직원들이 모인 장소였고 "나는 잘못이 없다, 그런 애기를 한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나는 꼭지가 돌아버려서 자칫하면 내가 맞더라도 싸운다는 의지로 인종차별적 욕설을 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애기했다. 몇번 실랑이를 벌이니 그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꼬리내린다. 그 후 자신의 사과를 받아달라고 한다.나도 더이상 일을 크게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일을 일단락 했다.


이후에는 나에게 뒤에서 욕설을 하는자가 없어졌다. 하지만 몇일 뒤 나는 결국에 패배하고 말았다. 견뎌낼 수 없었다.

유명한 보험사에서 호텔에서 회식을 했는데, 나는 지하1층 주방에서 바베큐 주방으로 식재료를 나르고 있었다.

갑자기 술에 취한 아일랜드 남자가 내 뒤통수를 웃으며 때린다. 나는 업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째려보는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계속해서 나를 비웃는다.


다음날 나는 헤드쉐프 토마스에게 사직의사를 밝혔다. "다른 아시아인 식당으로 갈것이냐?"라고 묻는 주방직원의 말에 나는 그럴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겐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수쉐프가 인종차별 문제로 일이 붉어젔을때 나에게 한 말이있다.


"상대가 나를 공격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해!"


수쉐프의 조언이 맞다. 밖이라면 몰라도 직장내에서는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게 맞다. 하지만 나의 소심함인지 나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도 몰랐고, 나를 지켜내는 힘도 부족했다. 나는 절망했다.


호텔을 그만두고 나서 1주일간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그리고 긴장이 풀렸는지 허리가 아파 이틀을 침대에 내리 누웠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이제 이만 하면 됬다고.


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아침, 더블린을 떠난다고, 다시는 오고싶지 않다고 하니 택시기사가 나에게 말했다.

"문화적 다름 때문일 수 있다." 라고


여행이 삶이되는 순간 인생의 무게가 또다시 다가온다.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6개월의 더블린 생활을 끝내고 태국의 치앙마이로 향했다.


Galway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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