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rD57P9RjTE?si=c2pjtcA6HKfPDIVU
부산에 여행을 와서 영화 러브레터의 "HIS SMILE"이라는 곡을 우연히 듣게되었다. 일정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도미토리룸의 침대에 누워 이 음악을 듣고있으니, 냉기와 따뜻함이 섞인 피아노 선율이 나를 어떤 과거의 지점으로 이동시켜준다. 그때의 냄새와 향기, 온도와 습도, 활주로의 아스팔트 아지랑이가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 한구석에서 슬픔과 분노와 안도가 뒤섞인 어떠한 감정의 바람이 내 코끝을 찌른다. 눈가가 촉촉해지며 왜인지 알수 없는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한방울씩 그렇게 떨어진다.
2012년 나는 공군에 기술병으로 지원입대하게 된다. 20살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공군 기본 군사 훈련단이 있는 진주로 향했다. 6주간의 기본군사훈련을 받고 '항공기 초과저지'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보직을 부여받고 3주간의 특기교육을 마치게 된다.
*항공기 초과저지란?
비상상황시(엔진 고장등의 이유로) 전투기가 활주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활주로에 설치된 커다란망과 케이블을 점검하고 관련된 기계를 조작하는 업무
강원도에 있는 전투비행단의 소방구조중대(항공기 사고구조 및 화재진압 및 예방을 하는 부대) 에서 나의 진짜 군생활은 시작 되었다. 내가 처음 전입신고를 할 당시에는 라인(활주로)에 있는 소방중대건물이 리모델링을 하는 바람에 舊Hanger(구 격납고)에서 약 3개월간 생활을 했다. 80년대 지어진 노후화되고 편리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건물, 쓰레기 같은 악폐습과 부조리들이 모여있는 구행거에서의 생활은 20살의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였다. 형편없는 식사를 마치고 몰래 화장실 변기칸에 숨어서 먹어야 했던 초코파이와 선임들의 옷과 속옷까지 빨아널어야 했던 말도안되는 악폐습은 충격적이였으며 욕하며 갈구고 괴롭히는 선임들은 내 속에 그어진 어떤 선을 넘어버리며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몇몇의 선임들의 욕설과 따돌림등을 견딜수 없어 내가 신뢰할수 있는 맞선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살려달라는 내 외침은 생활관장을 거쳐 간부들에게 까지 흐르게 되었고 2명의 선임은 결국에 다른 중대로 재배치되게 된다.
간부와의 면담이 있을때 나는 이유없는 욕설과 따돌림을 견딜수 없으며 자살할수도 있을것 같다(실제로는 자살할 마음은 없었다) 라고 말했는데, 위에서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파악해서 그들과 나를 떨어뜨렸을거라 생각한다.
이 사건이 점차 사이즈를 키우며 중대를 넘어 대대로까지 보고되었을때 나를 바라보는 중대 리더의 분노와 거친 감정이 느껴지는 사나운 눈은 또 한번 마음의 상처로 다가왔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흐르자 나에게는 선임을 신고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는 일종의 낙인이 찍혀버렸다.
2년이라는 시간을 감옥과 같이 보내야하는 이곳에서 이 낙인은 또다른 시련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선임들이 부르면 큰 대답과 함께 발이 안보이도록 뛰어다녔다. 귀를 쫑긋세우며 언제라도 필요한게 있으면 가서 수발을 들려고 했었다. 이것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않아서, 그리고 죽고싶지 않아 내가 선택해야만 했던 행동이였다. 나는 살기위해 처절하게 노력했고 시간이 지나니 선임들도 나를 조금씩 인정해주며 낙인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2년이란의 시간동안 군대란 곳은 나에게 쇠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다. 야간비행(오후 6시 이후의 비행)이 있는날 Stand-by를 위해 대기하면서 밤하늘을 바라봤고 무수히 많은 달과 별들을 보게 되었다. 하늘은 뚫려있는데 나는 라인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날수 없는 이 답답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업무자체가 비상대기이고 출동준비를 해야하니 항상 마음에는 무거운 짐을 얹고 지냈던것 같다. 더욱이 사람의 생명과 직접 연관이 있다보니 병사의 신분에도 무게감은 엄청났다. (항공기 비상착륙시 기계를 조작해서 케이블등을 항공기에서 제거해야하는 업무와 각종 점검 및 정비업무가 있다)
베리어체인지(바람의 방향에 따라 활주로에 설치된 케이블의 위치를 바꾸는 작업)을 위해 뜨거운 여름날에도 무거운 케이블을 들고 뛰며, 영하의 기온에도 얼음을 망치로 깨가며 위치를 바꾸는 업무를 수행해야 했었는데 가장 최악인건 새벽 2시경에 일어나 1톤 트럭을 타고 눈비를 맞으며 활주로로 나가 작업해야 했던 순간이다. 당시에 1톤트럭에서는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음악과 눈비가 서로 섞이며 피곤함과 짜증과 분노가 섞인 그 감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잊을수가 없다.
내가 병장의 위치가 되었을때는 동기들과 함께 그간 진행된 말도안되는 악습과 폐습은 우리대에서 끊어내기로 하고 하나씩 없애갔다. 전화와 컴퓨터를 이병에게는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작은 것부터 큰것들까지 우리들은 하나씩 없애갔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언젠가는 나를 괴롭혔던 선임과 같던 사람들이 다시 부활해서 돌아올 것이며 하나씩 하나씩 악습과 폐습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끝이 없을것만 같은 지루함과 익숙해져가는 고단함 그리고 약간의 기쁨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나가며 드디어 전역날이 다가왔을때는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니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간경화가 진행되듯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느낌이였다. 그렇게 나의 2년의 군생활은 끝이났고 나는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작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P.S 마음의 벽이라는 글에서 게으른i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이 떠오릅니다.(지금은 삭제되어있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
어쩌면 저의 기억과 마음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고 표현하는건 나에게 있어 치유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에게 글쓰는 재미와 용기를 알려주신 CAMI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