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의 기다림 p62 백승미 글 명중 중에서
더플랜 훈련 중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면서 나를 직면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사고하는지 이 상황에서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직원들 업무를 배정할 때 MBTI 성향을 보고 적합한 곳에 배정하는데 그가 가진 성향과 역량 말고 내면의 흐름,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을 아는 것에 에니어그램이 너무 도움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회피하며 즐겁고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 나는 전형적인 7번 유형이다.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은 일이든 사람이든 가만두지 않는다. 심지어 가만두지 않을 때도 결코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악명 높은 낙천가다. 슬플 수 없는 나에게 남편의 죽음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나인데, 평생 슬픔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나의 삶은 최악의 언밸런스가 된 것이다.
기쁘고 싶었다. 슬픔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나는 남편과 헤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은 천국에 있고 나는 그곳에 있을 남편을 상상하며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슬프지 않을 수 있는 갖은 상상을 해냈다. 기독교인지만 한국 제사 문화에서는 밤 12시에 귀신이 나타난다 했으니, 나는 제삿밥을 먹으러 오
고 가는 저승의 영혼을 만나서 남편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내 소식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연결된다면 나는 슬프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의 영혼을 만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밤 12시 남편의 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갔다. 남들은 ‘무섭지 않냐’ 했지만 구천을 떠도는 그 많은 영혼도 내 남편처럼 누군가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을테니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대로 슬픔에 잠겨있을 수 없었다. 제발 한 귀신이라도 만나서 저승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이야기도 남편에게 전해지기를 기대
하며 100일이 넘도록 공원묘지를 찾았다. 나를 돕기 위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신 친정 엄마는 행여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하며 내가 들어오는 시간까지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슬퍼서 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만나기 위한 행복한 발걸음이었고,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귀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무척 궁금했다. ‘긴 머리에 흰 소복일까? 뼈들이 흐느적거리며 나올까?’ 그러다가 남편의 영혼을 만나는 상상도 여러 번 해보았다. ‘그 영혼은 나를 기억할까? 나를 보며 슬퍼할까? 반가워할까?’ 가끔은 남편이 부활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부활한 남편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 꿈은 악몽이었
다. 그렇게 나는 필사적으로 남편의 영혼과 만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백여 일이 지나도 공동묘지에서 저승 소식은 단 한 건도 만날 수 없었다. 기독교인이 무슨 귀신을 찾느냐 하겠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간절했다. 마냥 슬퍼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슬픔을 뛰어넘고 싶었다. 즐겁고 행복하고 수다스러운 7번 유형에게 영원한 슬픔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지자 나는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다.
에니어그램의 화살 이론에서는 7번 유형이 성화되는 방향이 5번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토록 5번으로 가기 힘든 나는 그 과정을 통해 침잠하고 깊어질 수 있었다. 영원한 슬픔을 견뎌내는 그 과정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기쁨이처럼 모든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싶은 나는 슬픔
이가 가져다주는 깊이와 차분함을 비로소 겸비할 수 있게 되었다. 즐거움과 만족만을 생각하던 나는 그 이면에 있는 차분함과 깊이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성숙으로 이끄는 5번 유형으로 가는 길이었음을 더플랜 훈련 과정 중에 깨닫게 되었다.
깊이가 없고 충동적이며 집중하지 못하고 참을성 부족하며 예의 없고 철없으며 형편없는 나! 그런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실패작 같은 나를 보면서 나는 결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울타리는 나에게 피터팬의 원더랜드 같았다. 그런 내게서 남편을 데려가시고 성숙해지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다. 평생 슬퍼할 일 없던 나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심으로 나는 전도서 3장의 말씀의 양면을 비로소 수용할 수 있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으니라”(전3:1-8)
남편을 내게서 데려가시고 비로소 나는 죽을 때, 심을 때, 울 때, 슬퍼할 때, 잃을 때, 버릴 때, 잠잠할 때, 미워할 때, 전쟁할 때를 경험하고 조금씩 성숙해졌다. 더 많이 성숙해야 하지만 부족한 내가 결코 밉지만은 않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날 때, 심을 때, 웃을 때, 춤출 때, 찾을 때, 지킬 때, 말할 때, 사랑할 때, 평화할 때를 즐기게도 하실 분임을 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 스스로 통찰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구분해 낼 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에너지가 나쁠 때 보이는 모습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때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의 에너지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줄 수 있다. 내가 실패작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실패작이 아니다.
나의 명랑함을 유난히 좋아하던 남편의 울타리 안에만 있었다면, 나는 결코 타인의 상처를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확실히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그분께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싶다. 내가 계획하고 이끄는 삶이 얼마나 부족한지 너무 잘 알기에 그리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셔서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일들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