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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Nov 18. 2020

남편을 박물관에 전시하다

2016년 밸런타인데이부터 화이트 데이까지 아라리오 뮤지엄에서는 실연의 사연을 접수받았다. 나는 호기심반 기대 반으로 사별 후 7년간 가지고 있었던 남편의 고장 난 차를 기증하겠다고 구구절절  사연을 보냈다. 차를 기증한다고 보냈지만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저 큰 차를 과연 제주도까지 전시할 수 있을까?’ 다음날 이메일로 답변이 왔다. 채택이 되었다고! 그리고 전시품을 다음 주까지 택배로 발송하라고 한다. 내가 ‘녹차가 아닌 차(CAR)’라고 보냈는데 무엇을 택배로 보내라는 말인가! 답변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왠지 실연 스토리는 가져갈 테니 전시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할 것이 예상이 되었다.  사기당한 느낌이 들었다. 공지에 나온 서울 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전화는 정상이 아니었다. 연결이 계속 안 된다는 메시지에 화가 났다. '사기꾼들 같으니라고 아무리 스토리가 고파도 그렇지 아픈 스토리들을 이런 식으로 수집하는가!' 싶었다. 공지 아래에 제주 사무소 번호가 있었다. 화난 심정으로 제주 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웬걸 이번에는 한 여성이 ‘아라리오 뮤지엄’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아라리오 뮤지엄에  보낸  신청서


화는 났는데 예상치 못하게 전화가 연결되니 당황스럽고 사연을 말하려니 목소리부터 떨린다. 나는 궁금한 것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차를 택배로 보낼 수 없지 않으냐. 부품을 내가 해체할 수 없으니 기술자를 불러야 한다. 어떤 게 나을지 말해달라.

남편의 손길이 있는 핸들이 나을까?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나는 내려앉은 타이어는 어떤가?

차의 심장인 엔진을 보내는 건 어떤가? “


쏟아지는 나의 질문에 상대는 박물관 부디렉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점잖케 전시 가능한지 여부를 보기 위해 직접 울산에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얼떨결에 약속을 정하고 나는 약속 날에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젊고 단아한 두 여성이 서있었다. 통화한 부디렉터와 실무자였다. 자동차 부품을 전시하기 위해 두 명씩이나 울산으로 오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기록을 위해 나와의 대화를 녹음한다 했다.      

7년간 마당에서 우리를 지켜주던 남편이 아끼던 오프로드 카

드디어 차를 선보였다. 차는 7년간 세차도 하지 않고 밖에 서있었으니 깨끗하지도 않고 뒷바퀴는 삭아서 내려앉아 있었다. 시동도 걸리지 않고 고철 덩어리와 다름없어서 이동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런데 두 분은 줄자로 차 전체를 재기 시작했다. 길이 높이 너비를! 그리고 제주도에 가서 확인하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부디렉터가 다녀갔지만 나는 불가능 쪽으로 마음이 더 가있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고 뒷바퀴를 못쓰니 상차 견인만(어부바 카) 가능하고 다시 제주로 가려면 배로 옮겨야 하고 박물관까지 이동하여 비로소 신차 전시관처럼 1층 전시관까지 밀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방법도 비용도 박물관에서 부담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안 그래도 상한 차가 이동하면서 더 상할까 하는 염려도 한몫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예상외로 부품이 아닌 차를 전시한다는 ‘가장 어려운 결정’을 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도 외모는 차이기에 전시를 하려면 말소를 하고 전시를 해야 했다. 차량 등록사무소 직원은 말소 용도가 박물관 전시는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한번도 해보지 않아서 진행은 더뎠다. 결국 아라리오의 도움을 받아서야 차는 말소될 수 있었다.

견인차가 오던 날 나는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땐 웃으면서 ‘김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술은 부자연스럽게 웃고 있고 눈에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견인기사는 ‘차가 오래됐네요.’ 한마디만 하시고 눈물을 읽었는지 말없이 작업하신다.

상차 견인을 마치고....

차를 보내고  한동안은 차가 서있던 자리만 보면 허전하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정말 잘한 결정을 한 것일까?      


아라리오 뮤지엄은 날짜를 정하는데 짖꿋다. '실연의 박물관' 접수기간이 밸런타인데이부터 화이트데이까지였는데 전시회 시작은 또 어린이날이다. 실연과는 반대되는 날들이다. 전시가 시작되었다. 신문과 언론에서 '실연에 관한 박물관'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남편의 차 사진이 메인으로 나왔다.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내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 것 같아서 아이들을 데려가기 전 혼자 먼저 다녀왔다. 놀랍게도 차는 박물관 1층이 아닌 5층에 전시되어있었다. 너무 지저분하거나 낡아 보이지 않으면서도 세월의 흔적을 담아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을 아라리오는 너무 잘 해냈다. 자동차 사진과 녹음했던 내 목소리가 영상과 함께 나오고 있는 5층 전시관 창문을 눈물이 멈출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제주에 몇 번 더 다녀갔다가 전시회 마지막 날에는 남편과 이별하러 다시 혼자 갔다.     

  


아리리오 뮤지엄 건물 5층이 열렸다.

 도대체 5층에서 차를 어떻게 내릴까 궁금했다. 커다란 크레인이 박물관 앞에 서 있었고 5층 한쪽 벽이 열렸다. 크레인은 아마도 8층 높이 즈음에서 줄을 내려걸었지 싶다. 차가 건물 밖으로 나와 크레인 줄에 대롱대롱 걸려있다. 옆 건물에 부딧칠 것 같기도 하고 약해 보이는 크레인 줄이 끊어져 차가 아래로 떨어져 밑에 사람이 다치는 상상이 되기도 했다. 크레인 줄은 차가 무거운지 가을바람 때문인지 흔들거렸다. 마치 80kg이던 남편의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처럼 말이다. 운구 크레인은 남편을 기울어지지 않게 그리고 상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정성을 기울여 내렸다. 얼마나 천천히 내리던지 전 과정을 쳐다보고 있으니 목이 아파올 정도였다. 너무 높아서 작아 보이던 차는 점점 가까이 내게로 왔다. 그리고 다시 견인차에 올랐다. 이제 다시 긴 여행 크로아티아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박물관 5층에서 내려와 크레인에 다시 실린 차

차를 전시할 즈음 세월호 2주년이 되었다. 누구보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공감한다. 누군가를 갑자기 보내고 남겨진 사람의 마음 말이다. 몇 년이 지나도 아이의 방을 정리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나도 남편의 차를 보낼 수가 없어서 7년을 세워두고 있었다. 내게 남편 같은 차를 아라리오에 뮤지엄에서 전시한 것은 아이들과 나에게 너무 고맙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차는 크로아티아까지 가지 않았다. 전시용 자동차를 이동할 때 기름이나 엔진 등이 크로아티아 법에 걸려서 차를 분해하는 대책이 필요해서 지금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있다.  작은 박물관을 할 수 있다면 울산으로 다시 가져와 전시를 하고 싶다.

실연의 박물관 이야기는 이렇게 책으로도 세상에 나왔다. 글을 정리하면서 아라리오 뮤지엄에 감사를 전한다. 특히 현재 (주)리우션의 공동대표인 당시 박물관 부디렉터였던 류정화 씨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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