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태양빛을 받아 그 빛 일부분 반사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빛의 기울기에 따라 한 달에 두 번, 보름 동안 계속 모습을 바꾼다. 보름달, 반달, 초승달 등 이름도 달라진다. 주기는 일정하고 변함이 없다. 그 변함없음에 기대 사람들은 달을 통해 그립거나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본다.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달에 보고 싶은 사람 얼굴을 그린다. 자세히 보면 달은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가득 차 달달하다. 달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과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가 정확히 같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달의 한쪽 얼굴만 보며 산다. 보이지 않는 달 뒷면은 어떻게 생겼을까?
여기 달을 보며 아파하는 두 여자의 노래가 있다. 이별을 아파하는 여자의 머리 위에 둥근달이 떠 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달빛이 따라오며 밝혀준다. 그림은 같다. 하지만 부르는 여자의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이별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둠 속에 니 얼굴 보다가 나도 몰래 울었어
소리 없이 날 따라오며 비춘 건, Finally 너였어
처음 내 사랑 비춰준 넌, 이별도 본 거야
처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대형 기획사 소속 10대 아이돌 여자애였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몸으로 노래했다. 소리로 듣는 No.1보다 눈으로 보는 No.1이 더 많았다. 몸집이 작아 큰 동작으로 리듬을 타던 소녀의 화려한 춤만 화면 가득 보였다. 슬픈 가사와는 달리 색색의 조명, 강한 비트 beat 속 그녀는 가량가량한 얼굴로 TV 출연을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절한 이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가 아픔을 모르고 즐기는 것 같아 거슬렸다. 눈물 가득한 이별을 저렇게 신나는 춤으로 표현하다니... 그렇게 아픔을 모를 것만 같았던 그 소녀는 너무 일찍,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는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렸다. 그녀의 모습은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소녀는 이울었다. 얼마 뒤, 소녀는 일본 가요시장에 데뷔를 했고 그곳에서 당당히 1등을 했다. 가수 보아였다.
You still my No.1, 날 찾지 말아 줘, 내 슬픔 가려줘
저 구름 뒤에 너를 숨겨 빛을 닫아줘
그를 아는 이 길이 내 눈물 모르게...
나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는 가볍게 즐기고, 스치며 듣는 노래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과 랩은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만큼 생존 주기도 짧아 금방 뜨고, 금방 사라졌다. 화려한 춤, 즐겁기 만한 리듬, 걸그룹은 가창력보다는 귀엽거나, 예쁘거나, 섹시한 모습으로만 승부한다고 판단했다. 얼마 전까지 TV만 틀면 나오던 아이돌 그룹이 지금은 사라져 그들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돌 음악은 순간 반짝하는 히트곡은 있어도, 명곡은 나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만 있지 시처럼 아름다운 사연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돌 음악을 귀를 써 듣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만 즐겼다. 몇몇 아이돌 노래만 듣고 색깔을 입혔다. 겨우겨우 빅뱅의 ‘거짓말’ 정도만 좋은 곡으로 기억한다.
변한 그를 욕하지 말아 줘, 니 얼굴도 변하니까
But I miss you,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도, 지난 추억도, 모두 다 사라져 가
10년이 지나 No.1을 다시 듣게 되었다. 이번엔 머리를 짧게 깎은 40대 초반 여자의 노래였다. 다른 악기 소리는 최대한 작게 하고 어쿠스틱 기타 소리를 무대 가득 깔아 놓았다. 기타 소리는 매혹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에게 께꼈다. TV에 자주 나오지 않고 다문다문 소식만 전하던 여가수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덤덤히, 아무런 움직임 없이, 오직 목소리로 애절한 이별의 느낌을 전달했다. 가사에 감정을 얹어 또박또박 노래했다. 40대 여자의 이별 노래엔 춤은 없었다. 가수 이소라였다.
You still my No.1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
날 대신해서 그의 길을 배웅해 줄래
못다 전한 내 사랑, 나처럼 비춰줘
이소라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마음속 깊은 상처를 소리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게 더 애절해 보였다. 그렇지, 그래야지... 그렇게 내 귀에 딱 듣기 좋은 저 노래가 10년 동안 댄스곡으로 알고 있었던 No.1이었다니! 40대 초반, 완숙한 여자가 부르는 No.1은 전혀 달랐다. 정말 달랐다. 느린 박자, 조용하게 깔리는 음악을 배경으로 한 가사가 내 귀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왜 이제야 저 애절한 가사가 들리지? 그렁그렁 내가 달라졌나?
가끔 잠든 나의 창에 찾아와 그의 안부를 전해줄래
나 꿈결 속에서 따뜻한 그의 손 느낄 수 있도록
하지만 오늘 밤 날 찾지 말아 줘, 나의 슬픔 가려줘
‘나는 가수다’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노래를 다른 가수를 통해, 완전히 다르게 재편집한 새로움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곡曲 중간을 다르게 변주하거나, 가수의 풍부한 무대 경력으로 노련하게 음을 처리하는 정도의 곡 변형은 늘 있었지만, 아예 통째로 곡을 재해석해서 들려주는 음악은 처음이었다. 색깔이 180도 달라진 노래를 들으면서 ‘아! 같은 음악도 저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구나. 부르는 사람마다, 듣는 사람의 기억과 추억에 따라 곡이 싹 달라질 수 있구나.’ 그때 난 완전히 달라진 No.1을 만났다.
어둠 속에 니 얼굴 보다가...
이소라의 No.1을 들으며 모로 누웠던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반듯이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 좁고 어두운 우물 속에 있었구나. 어린 보아의 방긋거리는 겉모습과 춤만 보고 음악 속에 숨겨진 아픔을 보지 못했구나. 보아뿐 아니라 많은 아이돌 음악들을 제대로 한 번 듣지도 않았구나.
나와 맞지 않으면... 그저 나와 다르면... 좋지 않다는 이미지를 미리 덧씌우고 있었구나. 내 눈은 한 면만, 그것도 껍데기만 보고 있었구나! 내용을 제대로 듣거나 보지도 않고 다 아는 것처럼 굴었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구나. 그렇게 살았었구나. No.1의 리듬이 계속 감치고 있었다. No.1... 제일 먼저 뇌 속 깊이 새긴다!
‘일체의 편견을 없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