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범어사에 간다. 절 구석 한 자리, 익숙한 자리에서 명상을 한다. 좋은 말로 명상을 하는 것이고 그냥 멍 때리다 온다. 범어사 다니러 오는 서너 시간은 그냥 멍한 채 나를 만나는 단순한 행복 루틴(routine)이다. 집에서 범어사까지 20여km. 차로든 대중교통이든 왔다 갔다 두시간이다. 그래도 시간만 나면 범어사에 간다.
범어사가 가까워지면 혼자만의 수행이 시작된다. 입은 닫고 귀는 연다. 묵언默言이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다. 익숙한 나한전까지 포행布行. 항상 그 길이다. 물소리, 새소리, 대숲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긴다. 신발 코끝만 보며 일주문을 지날 때, 지금까지 제대로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살핀다. 종무소 앞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마음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 끝엔 늘 보상하듯 편안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 길 위서 범어사의 사계절이 여러 번 지나갔다. 마음은 그렇게 이 계단 위에서 늘 쉬어간다. 아름다운 길이다.
범어사 나한전, 촛불을 켜고 향을 올리고 삼배를 하며 생각한다. 그냥 육근六根의 작용 반작용으로 살았는지, 손톱만큼의 바라밀波羅蜜이라도 있었는지 생각한다. 구석에 조용히 반가부좌를 한다. 좌우로 몸을 흔들고 기지개해서 몸을 편안히 한다. 멍때리기야 집이든 공원이든 어디든, 본인이 원하면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여기 범어사 나한전은 향기나 소리나 자리나 내 취향에 딱 맞는 곳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눈을 감는다. 시각으로 들어오던 영상정보는 단절된다. 하지만 눈을 감고도 보이는 영상이 있다. 그것들은 기억의 단편들이 순서 없이 조합된 것이다. 머릿속의 영상은 이 기억과 저 기억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끔씩 안드로메다로 빠지도 한다.
소리 정보는 더 민감해진다. 새소리, 벌레소리, 도전적인 벌소리를 듣는데 한번씩 벌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좋은 향이 코로 들어온다. 향내를 따라가다 보면 소리와 호흡만 남고 다른 감각과 느낌들은 잦아들다 멎는다. 시간도 멈추고, 숨 쉬는 것도 잊게 될 때쯤, 호흡이 깊어지면 모든 것이 함께 정지한다. 반가부좌 다리와 손의 감각도 사라지고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 아주 가끔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살짝 바람만 불어도,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도 온 몸이 찌릿찌릿 해 진다. 무릎 저림은 찌릿하고 뜨거운 기운과 함께 사라진다. 뭉쳤던 근육이나 결린 곳도 풀어진다. 겨울에도 살짝 땀이 난다. 이 맛에 여기에 온다.
멍 때리기로 보는 것의 예시는 이런 것이다. 40여년 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잘 안다고 믿었던 단어의 본 모습을 오늘 새롭게 보았다. ‘자비慈悲’, 그 단어의 자리는 베푸는 자리가 아니고 마음이 시작하는 자리란 걸 오늘에 사 제대로 보았다. 그 자리에 머무는 동안 제일 좋은 것은 이런 탐색을 하느라고 걱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과 관계도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회사, 승진, 대출, 병원 등 세상만사 복잡한 모든 일들이 일시 정지하거나 역시 사라진다. 일상의 복잡한 문제에서 아예 벗어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세상일들이 다시 떠올라도 아예 모른 척한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멀리 떨어져 보는 시선이 생긴다. 명상 전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거나 근심이 없어진다. 그게 좋다. 화를 내거나 부딪히기보다는 한걸음 떨어져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도 해결점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떠나보낸다. 회피한다. 그게 정답이다. 오랫동안 내가 풀지 못한 문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범어사를 다녀오면 항상 그런 마음 상태를 유지한다.
범어사는 시간 나면 즐기는, 나를 만날 수 있는 취미생활이다. 일주문 앞에서, 종무소 앞 계단에서, 대웅전 앞마당에서, 나한전에서 범어사 곳곳에서 나는 나를 만난다. 그래서 나는 범어사다.
그런 범어사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며칠 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범어사 동영상을 올렸더니 같이 공부하고 있는 동기? 도반?이 카톡방에서 내게 물었다.
“종준 선생님은 왜 늘 범어사일까? 궁금합니다?”
내가 되물었다.
“제가 범어사면 향기님은 어디신가요?”
잠시 침묵. 1분... 2분... 3분...
찍고 박고 치고 박고 할 생각을 하느라 잠시 망설였다. 4분이 넘어가자 다른 분 말씀이 ‘훅’ 들어왔다.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 홍련암이 가슴 뛰게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엄마 생신이어서 생일상 차려 산소 갔다가 이제 절에 가는 길입니다. 내키면 홍련암까지 고고!”
내가 대답했다.
“홍련암=범어사”
그러자 도반의 대답이 나왔다.
“전 선암사입니다만...”
“왜 선암사입니까?
”제가 먼저 질문했지 말입니다!“
”그 답을 하고 있습니다. 왜 선암사입니까?“
”저는 집 뒤에 절이 있어 다니기 시작한 게 인연이 되어.“
”또? 뭐가 있나요?“
”처음엔 남편 사업 잘 되라고 다녔고, 다음엔 자식들 건강하게 해 달라고...“
”다음엔요?“
”언젠가 제가 대웅전 밖에 등을 달았는데 그날 비가 와서 등이 다 젖었더랬죠.“
”그래서? 어떻게?“
”등이 젖었으니 부처님께 빌었던 제 소원이 다 젖어버렸다고 생각했구요, 그해 남편 사업이 망하고 손도 다치고...“
”아시다시피 전 참을성이 없고 가볍습니다. 향기님... 정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등이 젖어서 그리되었다고 생각했죠.”
“힌트 홍련암=범어사입니다. 그리되었다? 잘 안풀렸다?”
“옙! 저도 제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어느 절인들 뭐가 다르겠습니까만.”
“그럼 선암사≠범어사입니다.”
“예. 집 뒤 절도 범어사인 것을.”
“어렵지 않고 무겁지 않고, 재미있기를 바랍니다. 향기님!”
“굳이 범어사에 가는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요?”
제가 답했습니다.
“홍련암에는 예인샘이 있는데, 선암사에는 향기님이 없습니다. 부군과 아이들만 있을 뿐~.”
잠시 뒤.
“아하!”
“범어사는 그냥 접니다. 와이프도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그냥... 늘 접니다!”
향기님이 엄지척!
“그 돌 안에 있던 부처가사 한자락이 나왔네요. 이건 수업료 받아야 되는데.”
“제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나보죠. 비에 젖은 등을 보는 순간...”
“죄송합니다. 늘 가볍고 말많은 저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더 가벼워 지시길 바래요.”
“부처님 오신 날이라... 흉내내기 했습니다. 이제 향기님에게 오롯히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을 먼저 보시길 기원합니다.”
“예. 연습 중 입니다. 저도 제 안이 이렇다는 것을 요즘 많이 놀라고 있어요.”
풍경소리 이모티콘!
“자신을 안다는 것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가장 중요한 답은 오직 모를 뿐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이 그 자리에 들어오셨다.
“오고 가는 선문답이 좋습니다.”
“어줍잖은 이야기 깊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