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에서 선수 정원 세 명인 판에 참여자가 세 명 이상이면,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광光을 팔아서 광값을 챙길 수 있다. 순번이 빠른 사람 중에도 패가 불리하면 그 판을 포기하면서 광값, 고도리 값 등 약속된 대가를 챙길 수 있다. 광光 팔고 죽는 전략은 한 판을 온전히 쉬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안전하고 좋은 전략이다. 하지만 이런 불로소득不勞所得의 남발을 방지하기 위해, 한 사람이 세 번 연속해서 죽으면 한판 기본 값을 참여자들에게 내놔야 한다. 어떤 지역에선 연사連死, 두 번 연달아 죽는 것은 ‘없다’는 곳도 있다. 미리 죽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 좋은 제도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있는 것이 집에서 잘못되고 죽어 나가는 것이 보기 싫어 부러 생물들을 집안에 키우진 않았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행사 뒤에 받은 동양란 몇 촉, 산세비에리아 몇 그루, 금전수 등 화분 열 개가 집 안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난의 고매함을 즐기거나, 조경용 식물을 키우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햇볕 좋은 베란다에 두고 생각나면 일주일에 한두 번 수돗물을 뿌려주는 것으로 관리를 대신했다. 생일 축하 난蘭 한 촉으로 시작한 된 어설픈 식물관리 십여 년 동안, 그 애들이 죽지 않고 끈질기게 다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좋은 햇빛, 최소의 물만 있으면 이어가는 생명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깜박하고 너무 오래 물을 안 줘서 말라죽었나 싶었는데, 숨어있던 작은 잎들이 쑥쑥 자라 다시 큰 잎으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다. 당당하고 건강한 녹색의 힘 있는 자태를 보여준다. 잘 챙겨 주지 못해도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2010년 한 해, 만 오천 명 넘는 사람들이 삶을 포기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구장 수용인원 기준으로, 몇몇 큰 야구장을 빼고 웬만한 야구장에 꽉 찬, 사람 숫자만큼 매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니 충격이다. 인구 10만 명을 기준으로 그리스가 2.2명, 멕시코 4.9명, OECD 국가 평균이 12.9명인데 대한민국은 독보적인 33.5명이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8년 연속 1위!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틀이 아직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연금, 의료보험, 기초노령연금 등 최소한의 기본 복지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그런데도 한 해 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죽는다면, 제도나 시스템 어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특히 자살의 원인이 경쟁 중심의 사회구조, 양극화 심화, 가족의 붕괴, 사회적 상대적 박탈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이 원인이라면 이건 개인의 삶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리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된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꼭 보는 풍경이 있다. 사람들 대부분 이어폰을 꼽고 고개를 숙이고 자기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게임을 하든, 드라마를 보든, 카카오 톡을 하든, 자신이 소속된 자신만의 세상에 깊이 빠져 있다. 주위 사람의 반응과 눈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행여 높은 자살률이 저런 모습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초등학생을 포함하여 거의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IT 기기만 켜면 언제 어디서든 페이스 북, 트위터, 유튜브...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람, 다른 세상과 바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쉼 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세상 소식을 듣고, 즉시 반응한다.
스마트폰이 있기 전 모습과 비교해 보면 지하철에서 대화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친구와 함께 있어도, 부모형제를 앞에 두고도 눈이 스마트폰에 꽂혀 있기 때문이다.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 사람이 있는데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손가락 놀림으로 문자 메시지를 쓰고 화면만 터치할 뿐이다. 숨 쉬는 사람 손을 잡기보다 딱딱한 기계 몸을 두드리는 것이 더 편안한 것 같다. IT 기기를 통해 언제나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세상 소식을 바로바로 볼 수 있고 속도 빠른 그 세상 중심에 내가 있다는 짜릿한 기분을 즐기고 있는 표정들이다. 저 사람들이 만약 스마트폰이 없고, 인터넷이 없는 곳에 혼자 있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할까? 고요히 명상을 할까? 아니면 책을 읽을까?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을까? 그런 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마 시간이 남아돌아 뭘 해야 할지 헷갈릴 것이다.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그저 고요히 실존적 나와 마주해 본 경험이 부족해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 것이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이 되어 버리고, 내게 문제가 발생하면 혼자서 어쩔 줄 몰라 하다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사회. 이런 상태에선 자살률을 낮출 현묘玄妙한 답은 없다. IT, 그 좋은 기술로 자살을 예방하는 앱을 만들 수는 없을까?
자살률이 낮았던 70년대, 80년대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 가난함을 함께 공유했던,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비슷비슷한 아픔과 가난이 존재해 가족이 가족을, 이웃이 이웃을, 사회가 사회를 보듬는 마음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었어도, 없는 사람을 서로서로 돌보고 살펴보는 눈과 손이 있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의 강을 함께 건넌다는 동기同期의 의식이 만들어 낸 사회적 묵계黙契가 있었다. 그 세월을 건너며 가졌던 좋은 제도를 살리지 못하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 어떤 문제의 큰 고통 속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고민하고 있다면 좀 뻔뻔해지기를 권한다.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움켜쥐고 있는 그 문제,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드러내 주길 바란다. 어떤 핑계도 좋으니 당신의 문제를 이 사회에 그냥 던져 버리고 하루나 이틀, 사흘만 더 살아보길 바란다. 우리 사회 전체가 당신을 혼자 있게 했고, 당신이 말을 할 수 없는 심리상태를 만들었고, 적극적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부족했다. 함께 고민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길 당신께 요청한다. 당신이 아는 누구라도 상관없다. 당신을 잘 모르는 봉사 단체나 공공기관에도 너그러운 당신이 손을 한 번 더 내밀어 주기 바란다.
정현종 시인의 노래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모든 것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가는 것도 어마어마한데, 하물며 죽고 사는 일이야 말해 무엇 할까? 한 사람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이 엄청난 소식이, 이젠 매일 보는 보통 뉴스가 되어버렸다. 죽기, 있기? 없기? 당연히 없기! 죽기 없기! 절대로 포기하지 말기! 당신이 죽는 그 엄청난 사건이 그저 그렇고 그런, 일반 뉴스로 방송되기 없기! 살기! 꼭 살기!
하루 서른세 명, 그들은... 막다른 낭떠러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 몰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