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8살들에게

중학생의 일상

by 에원

나는 내 글씨체가 좋다.

조금 못생겼어도, 남자애 글씨 같아도, 사람들이 못 알아봐도 좋다. 내 글씬데, 나라도 좋아해야지.


선생님들은 글씨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하신다. 이런, 그럼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거지? 한글도 문제지만 영어도 잘 못쓰는데, 숫자는 더, 기호는 더 더 못쓰는데.


못생긴 내 글씨가 싫은 순간들은 몇 번 없다. 그러나 나도 다른 여자아이를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올바른 정확하고 특색 있는 예쁜 글씨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몇 번 있다. 필기를 열심히 해야 하는 과목이나 학원에서는 그런 느낌을 더 자주 받는다. 나는 정리(필기)에도 소질이 없는 데다가 글자도 크고 못생겨서 더 가관이다.


그러나 진짜 신경 쓰이는 건 시험이다.


나는 중2인데 우리 학년부터 1학년 2학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번까지 4번 정도 지필평가를 보았는데, 역시나 우리 학년부터 지필고사를 보는 모든 과목의 시험에서 객관식 문제에 더불어 서술형이 포함된다. 수학, 국어, 영어, 과학, 사회, 역사 등 과목에서 OMR 카드에 서술형 문제 답을 2~3개 정도 써야 한다.


아무리 중학교지만 당연히 성적이 신경 쓰인다. 객관식은 체크하면 되지만 주관식은 내가 쓴 내용으로 평가당하고 깎인다. 대부분 2~3문제에 배점이 10점~12점 정도 되지만 사실 선생님들께서 정하시는 대로 되는 거라 서술형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번 중간고사 국어에서는 서술형 배점이 무려 30점이었다. 3문제에 30점.

이렇게 후덜덜 무서운 상황에서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글자 못 알아보면 철자오류 처리한다'.


객관식을 모두 풀고 서술된 답안을 OMR에 옮겨 적고 난 후에, 나는 내가 쓴 답안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내용 검토도 그렇지만, 제3자의 입장으로 내 글씨가 알아볼만한가, 계속해서 본다. 이상한 글씨는 화이트로 덧칠하고 계속 고친다.


영어 서술형은 굉장히 간단하다. 주로 문장 한두 개를 영작하는 문제인데, 뒷자리 애들이 OMR을 걷을 때 보면 모두 간단한 1줄로 써왔다. 아무도 노란 OMR에 흰 화이트를 덧칠하지 않았다.

내 OMR카드만 답이 쓰인 곳이 흰색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흰색 바탕 위에 답을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읽을 때 a와 u가 헷갈리지는 않은지, r과 v가 헷갈리지는 않은지, n과 h가 헷갈리지는 않은지, 몇 번이고 보고 고친 탓이다.


수학도 매한가지다.

나는 문자 x를 매우 독특하게 써서 선생님이 알아보실 수 있는 정도인가... 항상 심장이 쫄깃하다. 위의 사진에서 중앙에 있는 글자가 4(x+y-2)인데, 저 x는 그나마 양호한 모양의 x이다.


지필평가도 문제지만 사실 더한 건 수행평가다.

수행평가에서 논술형 비중이 많아지면서 내 고민도 심화되었다. 신경 쓰면 나름 괜찮은 글씨를 쓸 수 있는데 빨리 쓰거나 긴장하면 (주로 논술 수행평가 초반) 글씨가 정말 날아다녀서 후처치가 꽤나 곤란하다. 한두 글자면 수월히 고칠 수 있는데 문장 자체가 날아다니면 고치기가 정말 애매하다. 원고지면 더하다.


물론 나보다 더한 남자아이들의 암호(?)도 무사히 해독하시는 대단한 대한민국의 선생님들 덕분에 아직까지도 글씨 때문에 점수가 깎인 적은 없다.


그러나 애초에 계속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 기본적인 내용도 남들만큼 쉽게 쓸 수 없다는 게 억울하다. 앞으로 고등학교 가서 성적이 더 중요 해질 텐데, 미래의 나에게 너무 미안하다.

너무 오랫동안 이 글씨로 살아왔는데, 쉽게 바꾸지는 못할 것 같다. 올해 여름방학에도 글씨체 교정을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이 있었으나 공수 1을 교정하기 위해 포기했다.


과거의 8살 나에게, 그리고 이제 한글을 배우는 모든 아이들한테 한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

단연코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글자 좀 예쁘게 쓰라고 할 텐데.


그마저도 잔소리로 들리겠지?ㅎ



오늘 글 손글씨ver.




오늘도 간절함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에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