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들

합주에서 만났던 인연들 1

by 에원

이번 주 금요일(내 기준으로는 '오늘'이다. 나는 부지런한 작가가 아니라서 일요일 발행할 글을 금요일, 토요일 쓰기 때문이다) 3시 40분경 집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은 여태 금요일과 아주 똑같았다.


키링 몇 개가 달린, 자신의 몸보다는 작은 까만 바이올린 케이스를 한쪽 어깨에 대충 메고, 다른 손으로는 7년 가까이 들고 다닌, 쓰지도 않는 무거운 악보들이 가득한 파란 에코백 비슷한 녀석을 든 상태로, 머리를 대충 질끈 묶고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상태.


학교에서 와서 한 10분 정도 유튜브를 보다 나온 상태여서 입던 교복 그대로. 한쪽 귀에 꼽힌 이어폰에서 오늘(글 쓰던 날 기준, 11월 21) 갓 나온 따끈따끈한 스트레이키즈 신곡이 둠칫둠칫.

집안에 널브러져 있다 나왔기에 좀 부스스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신곡 'Do it' 이랑 '신선놀음'을 들으며 좋아하지 않는 바이올린을 'do it'하러 가는 중이다.


뭐 어쩌겠어. 해야지. 가야지. 여태까지 그랬는걸.


저번 글에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 학원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어머니 한분과 엄청 작은 남자애 하나가 있다. 한 6개월 전만 해도 내 앞 타임에 레슨 하던 녀석인데, 요즘 안 보인다 싶었는데... 역시 또 마주치는군.


그 애는 날 올려다보고 난 어머니 앞에서 같이 얘기하던 쌤한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오."

"어 그래 에원이 왔어? 들어가, 들어가."


그 남자애한테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나는 레슨실로 들어간다. 귀엽긴 한데, 뭐 스쳐 지나가는 인연.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레슨실에 들어가면서 그 아이 어머니가 하는 말을 얼핏 듣는다.


"응, 누나 왔네? 그치? 누나 왔다."


저번에 저 아이 레슨이 끝나길 기다리던 나의 귀에 스쳤던 또 다른 말도 생각난다. 역시나 저 아이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아휴~ 우리 00이 오늘 너무 멋있었어!"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그러니까, 어? 저 밖에 누나가 너한테 홀딱 반했대!" (그 아이 어머니)



에?


저요?


그러니까 제가 제 무릎 높이도 안 오는 꼬맹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낑낑 소리에 반했다고요?

아, 네 좀 귀엽긴 하죠. 그렇지만 귀에 꼽혀있는 이어폰 덕에 실제로 연주하는 건 못 들었는데 어떡하죠?


상관없다, 어차피 저 애가 날 기억할 리도 없으며 우린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다.


그때의 황당함을 떠올리며 내 바이올린을 푸르다가 다시금 그 애의 눈빛이 떠오른다.

묘하게 익숙하다, 묘하게 닮았다.

그 아이가 날 바라보던 눈빛은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를 바라보던 눈빛과 상당히 닮아있다. 더 나아가, 다른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과도 상당히 닮아있다.

스쳐 지나가지 않고, 조금 더 머물던 그 인연들 중에서 조금 '옛 멤버' 그러니까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멤버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더불어, 그때의 합주도.






저번에 상술되었던 학원의 일종의 거실(?) 같은 공간에서 레슨실들 말고 더 넓은 합주실로 가는 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방이 펼쳐진다.


절반 정도가 한 10cm 높이의 무대? 비슷한 것이고 무대를 마주 보는 문이 있는 쪽 벽에는 문 양옆으로 엄마들이 앉을 의자가 놓여있다. 한쪽 구석에는 피아노와 반주를 맞추기 위한 기계가 있고 쌤이 쓰는 악보대가 놓여있다.


이곳은 학원의 합주를 위한 공간.


월요일 저녁, 한 6시~8시에 스케줄상 참여할 수 있는(그러니까, 좀 어린) 학원의 재학생들이 모두 모여 다 같이 곡을 연주한다.


스즈키 1권부터 시작한다. 처음 학원에 가면 배우는 게 1권이므로 모든 아이들이 합주에 같이 선다.

선생님이 반주를 틀고 연주하시면 우리는 그 연주에 맞춰서 같이 연주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어디서 왔든, 그냥 그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같이 연주하는 거다.

앞에서 엄마들은 우릴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신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야무진 박수를 보내고 아이들에게 호응하는 것도 그분들의 몫이다.


1권에서 한 3곡정도 하면 2권을 시작한다. 2권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이만 내려간다. 엄마에게로 가서 합주를 구경한다. 2권이 끝나면 3권... 그런 식으로 그때 당시 한 6권까지 정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합주가 참 좋았다.


레슨보다 자유로워서 좋았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무대에 서는 게 좋았다.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세상 사람들(그 앞에 앉은 엄마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좋았다.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잘하는 언니들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우와 진짜 잘한다...


이전 글들에서 몇 번 언급한 것처럼 난 클래식에 대한 묘한 동경이 있으며 거부감이 없어 '언니오빠들'의 화려한 손놀림에 감탄했었다.



이런 합주는 그야말로 아이들끼리 친해지기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그 중 '바이올린' 했을때 빼놓기 아쉬운 '옛 멤버' 몇명만 빠르게 말하려 한다.


바이올린의 기록에 그들을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ㅎ




제일 먼저 아직까지도 친한 언니 S.

S언니를 통해서 아마 내가 실물 바이올린을 처음 봤을 거다.

언니네 집에서 봤더 바이올린에 신기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S 언니는 우리 집 근처에 살았었고 엄마들끼리 친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 언니는 합주가 계속돼도 오래도록 들었고 우리도 덩달아 그 곁을 지켰다.

그 언니도 귀가 밝고 연주를 잘했던 것 같다.


"에원아 S는 지금 3권 연주하는데, 4권 노래를 많이 들었더니 합주 때 4권 노래들도 연주할 수 있대. 많이 듣는 게 좋은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바이올린 음악을 틀어주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그 언니도 꽤나 특출 났던 모양이다.


합주가 끝나면 S언니와 S언니 엄마, 그리고 나와 내 쌍둥이, 우리 엄마는 같이 집으로 걸어갔다.

같은 동네에 살긴 했지만 언니네와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이 있었다.


그 갈림길 근처에 오면 나와 쌍둥이, S 언니는 걷던 속도를 엄~~~~~~청 줄였다.

그야말로 1초에 1cm를 엉금엉금 가는 꼴.


"느리게 가자, 느리게."

"가고 있기는 해. 엄청 느리게 가는 거야."


헤어지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게 천천히 걸었다.

엄마들은 우릴 앞질러서 걸어갔고 나중에는 엄마들이 안보는 틈을 타 다시 뒤돌아서 1~2m 정도 뛰어가기도 했다.

엄마들이 뒤돌아보면 다시 모른 척 천천히 걷기.


"에원아, 이제 우리 집 가야지."

"S야, 많이 늦었다. 이제 가자. 인사해."


그렇게 느리게 걷고 걷고 돌아가고 또 느리게 걸어도 어쨌든 이별은 있어야 하는 법.

'이제 그만해' 라며 엄마들이 엄하게 말하면 결국 우리는 인사를 하며 시무룩하게 헤어졌다.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언니가 멀리 이사를 가게 되면서 S언니와 진짜 이별을 하게 되기도 했다.

합주가 끝나고 모두가 나간 텅 빈 합주실에서 나와 내 쌍둥이가 건넸던 어색한 마지막 인사를 난 아직도 못 잊는다.





S 언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절친' Y 언니도 있었다.

(최근에 S 언니한테 물어보니까 이사 후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Y 언니는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다.

Y 언니를 보고 S 언니가 따라서 시작했으니까. 그렇기에 진도도 제일 빨랐고 제일 잘했다.


합주는 제일 잘하는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하기에, 나중에는 그 언니 혼자 남아서 6권을 연주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사실 어린아이 한 명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는 그렇게 크지도 임팩트 있지도 않아서 나는 S 언니나 다른 사람들이랑 좀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엄마가


"쉿, Y가 독주하잖아."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합주에서 독주를 할 수 있던 자격을 가진, '잘하는 언니'였다.

'비브라토'를 배웠다며 나에게 자랑하던 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 이후에 코로나 이후에 합주에서 다시 만난 Y 언니는 그때를 그리며


"아 진짜, 쌤이 맨날 나 혼자 시켜서 진짜 싫었는데."


라고 말하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한 한 달 동안은 같이 합주하면서 친해졌지만 그 이후에 언니가 끊으면서 Y 언니와도 이별하게 됐다. 그때는 사실 자연스러운 이별이란 것에 익숙해질 나이(한 4~5학년)이라 엄청 슬프지는 않았다.


코로나 이후 첫 합주는 '다시 만난 인연들'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인데, 그때 아마 Y언니가 몇 번 더 출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명의 남자아이가 존재한다.

이런, 이니셜이 겹친다.

그럼 이 아이는 'J'로 가자. 어쨌든 걔 이름에 J도 들어간다.


J는 나와 쌍둥이와 1학년때 어찌어찌 친했던 남자애다.

우리가 시작한 지 꽤 있다가 시작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도 차이도 꽤 났던 것 같다.


사실 초반에 J에 대해서 할 말은 별로 없다.

오히려, J는 어쩌면 나보다도 성실하게 바이올린을 계속해 코로나 이후에 만났을 때 진정한 인연으로써의 빛을 발휘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는 '피치카토'를 합주에서 처음 보신 J의 어머니께 내가 잘난 척하던 게 기억난다.


"에원아, 저건 뭐야?"

"아, 저건 '피치카토'라는 건데요, 아직 저도 못 배운 거예요. 엄청 많이 해야 배울 수 있어요."



'아직 저도 못 배운 거예요' 라니.

참 자신감에 차 있던 어릴 적의 나ㅎㅎ





'시간'이란 거친 파도와 바람을 통해서 많이 둥글게 변하고 깎이고 부드러워진 피아노나 레슨 초반 때 추억에 비하면 '합주'의 기억은 정말로 좀 따뜻했던 것 같다.

와글와글, 악기를 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북적댔으니 뭐, 재미있을 수밖에.


합주실의 노란빛 벽처럼 그때의 추억은 참 몽글몽글하고 노랗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아쉽게도 첫 번째 합주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엄청 긴장했겠지?ㅎㅎ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까 별로 긴장 안 했나.


옛날에 합주할 때 선생님이 엄마랑 같이 있는 애한테 빨리 무대에 올라오라고 했었다.

그 아이는


"너무 떨려요으헝 헝 헝"

이러면서 울음을 터트렸고 엄마들은 그 귀여운 모습에 모두 빵 터졌다.



'합주'는 누군가에게는 몽글몽글한 추억이지만 그때의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내가 몇 년 뒤에 어엿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것과 같이,

우리는 그 도전들을 밟아나가면서 살아간다.



오늘은 기분 좋은 합주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바이올린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든다.


고마워 바이올린아,

오늘 레슨 할 때 음정 엉망으로 짚어서 미안해.

내가 연습 안 해서 거 참 미안하다 야ㅎㅎ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구나...



오늘도 간절함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에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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