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 중에 사별을 하게 된 분이 있다.
그런데 장례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남편이 지병이 있어 오래 아프셨기에, 장례를 원치 않는다고 유언처럼 미리 부탁하셨다고 한다.
들을 땐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유족들이 그 뜻을 따라 그렇게 결정한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
머릿속에 내 남편의 장례식이 스쳤다.
그 3일의 시간이 정말 고인이 된 내 남편을 위한 시간이었을까.
장례는 고인의 삶을 기리며 고인이 편히 가시도록 예를 갖춰 대우하는, 고인을 위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내가 직접 겪기 전에는.
돌아보니, 아니었다.
겉으론 고인을 위한 자리이고 모든 절차가 고인을 위해 있지만, 사실 산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마음껏 미친 X처럼 울부짖어도 모든 게 이해되고 수용되던 시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와의 추억들을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유족들에게 건네주던 시간.
그를 미워했던 이들은 영정사진 앞에서 나를 용서하라고... 하염없이 목놓아 울며 자기 죄를 고백하던 시간.
분명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가끔 그 3일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잠깐 별장에 다녀오듯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 시간 속에 잠시 머무르며 하염없이... 아무 생각도 목적도 없이 그저 울기 위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겐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저 울기만 했던 3일이지만, 그 시간 속에 슬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몰랐던 시절의 기억 조각들을 선물 받는 기분이어서 행복했던 기억도 있고.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찾아와 (남편은 기간제교사였는데, 마지막 학교에서 학교폭력 업무를 맡았었다) 선생님이 그 시기에 큰 힘이 되어주셨었다고. 선생님 덕분이 그 힘든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런 말을 전했을 때는 감동을 받고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기억도 있고.
새벽에 유족실에서 잠을 자는 데 밖에서 꽤액꽤액 소리가 나서 동생이 ‘언니... 저쪽도 누가 돌아가셨나봐. 오열을 하네...’ 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 닭 농장에서 나는 닭 우는 소리였어서(ㅋㅋ) 세 모녀가 박장대소했던 기억도 있고.
조문객들이 눈물 콧물 다 쏟으며 나를 안고 상주인 나보다 더 오열하며 울어줄 땐 따뜻함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를 느꼈던 기억도 있고.
장례식을 생략했다던 그 지인 분의 소식이 그래서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에게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이 모두 소중했던 그 시간들, 내가 받았던 선물 같은 위로들이 그분에게는 온전히 주어지지 못했기에.
고인 분은 장례식이 고인만을 위한 자리라 생각했기에 그런 부탁을 하셨으리라. 혹은 남겨진 아내와 다른 유족들이 너무 슬퍼할까 봐 그러셨을지도.
그러나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버틸 수 있었을까. 지금 이렇게 남편을 마음껏 추억하고 건강하게 애도하는, 그럴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분명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한 시간이다.
이 죽음에 충분히 머무르고, 충분히 아파하고,
이 죽음을 충분히 추억하고 애도하도록 주어진...
그래서 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그런 시간.